울트라신(ultra-thin, 초박형) 시계 분야는 쉽지 않은 영역이다. 기계식 시계를 얇게 만들기 위해선 무브먼트의 설계를 뒤흔들어야 하고 모든 부품을 최대한 깎아내야 하며 어느 정도의 가독성과 정확성, 그리고 내구성을 수반해야 한다. 그만한 기술력을 갖춘 브랜드만이 울트라신의 링 위에 오른다. '워치스 앤 원더스 2024'에서 두께 2mm 투르비용 시계를 선보인 피아제, 두께 1.8mm 시계에 크로노미터 인증까지 획득한 불가리, 두께 1.75mm 시계가 5000G의 중력 가속도를 견디도록 만든 리차드 밀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번 '제네바 워치 데이즈'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러시아 브랜드 콘스탄틴 샤이킨(Konstantin Chaykin)이 두께 1.6mm에 불과한 시계를 선보인 것이다. 이름은 '씬킹(ThinKing)'. 현재 세계에서 가장 얇은 기계식 시계다. 콘스탄틴 샤이킨은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시계 제작자로, 독립 시계 제작자 협회 AHCI(Académie Horlogère des Créateurs Indépendants) 멤버이며, 기술력이 뒷받침된 파격적 디자인의 시계로 잘 알려졌다. 특히 눈 모양의 시와 분, 입 모양의 문 페이즈를 통해 웃는 얼굴을 다이얼로 형상화한 뤼스트몬(Wristmon) 컬렉션의 조커(Joker) 시리즈가 유명하다. 조커 시계는 2018년 GPHG에서 그 해 가장 독창적이고 대담한 작품에 수여되는 '오데시티(Audacity)' 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는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오래된 바뇰레(Bagnolet) 스타일 울트라 신 회중시계 무브먼트에서 씬킹의 영감을 얻었다. 프랑스 파리 근처의 바뇰레 비역에선 18세기 후반 매우 얇은 회중 시계가 등장했다. 바뇰레 무브먼트는 더 얇은 두께를 위해 뒤집힌 구조로 설계됐다. 기어 트레인과 부품들을 다이얼 반대편에 곧바로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콘스탄트 샤이킨은 "200년 전에도 만들었는데 지금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야심차게 도전에 착수했다.
콘스탄틴 샤이킨이 새롭게 선보인 씬킹 역시 뤼스트몬 컬렉션의 일부다. 시계 이름은 '생각(thinking)'과 동일하지만 대문자를 교묘하게 배치하는 언어유희를 통해 '얇은(시계의) 왕(ThinKing)'을 의미하고 있다. 시와 분이 분리된 뤼스트몬 특유의 웃는 얼굴 디스플레이는 울트라신에 최적화된 디자인이다. 중심축에 쌓았던 시침과 분침을 분리시켜야 기계식 시계를 얇게 만들기 유리하기 때문.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씬킹의 무게는 13.3g에 불과하다. 울트라신 시계에 많이 사용되는 텅스텐 카바이드보다 덜 견고하지만, 콘스틴틴 샤이킨은 씬킹의 스트랩에 티타늄 지지대와 탄성을 지닌 서스펜션 시스템을 구축해 소재의 한계를 극복했다.
진짜 혁신은 시계 안에 있다. 콘스탄트 샤이킨은 완전히 새로운 K.23-0 칼리버를 제작했다. 핵심 포인트는 더블 밸런스다. 더블 밸런스를 적용한 울트라 신 시계는 씬킹이 처음이다. 전통적인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은 4개 층으로 이뤄졌는데 더블 밸런스를 이용하면 2개 층으로 압축할 수 있다. 두께 면에서 유리하다. 콘스탄틴 샤이킨은 두 개의 밸런스 휠에 기능을 분배했다. 첫 번째 밸런스 휠은 이스케이프 앵커와 함께 작동하고, 헤어 스프링은 두 번째 밸런스 휠에 장착된다. 밸런스 휠이 진동할 때 이스케이프 앵커(팰릿 포크)와 상호작용하며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을 제어하는 롤러(roller, 로터 테이블) 및 임펄스 주얼도 밸런스 휠과 분리됐다. 이 두 부분은 톱니바퀴로 나란히 연결됐다. 즉, 앵커와 밸런스 휠 사이에 롤러 휠이 존재한다. 밸런스 휠이 진동하면 롤러 휠이 움직이며 이스케이프 앵커에 힘을 전달한다.
보통의 울트라신 시계처럼 무브먼트 메인 플레이트를 겸하는 케이스백을 보면 그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콘스탄틴 샤이킨이 친절하게도 서명과 함께 기어 트레인의 구조를 새겨뒀다. 진동수는 18,000vph로 평균적인 28,800vph보다 낮게 만들었다. 밸런스 휠이 빠르게 진동하면 시간을 더 정밀하게 특정할 수 있는 대신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느리게 진동하면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므로 파워 리저브 측면에서 유리하다. 다만 K.23-0 칼리버의 경우 메인 스프링(태엽)도 얇기 때문에 파워 리저브는 32시간에 불과하다. 시계 두께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적은 편이 아니다. 콘스탄틴 샤이킨은 배럴 덮개와 래칫 휠 대신 역회전 방지 부품인 파울(pawl)과 스프링 시스템을 도입해 메인 스프링의 와인딩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콘스탄틴 샤이킨의 천재적 아이디어가 또 있다. '팔란킹PalanKing'이라 이름 붙은 케이스 캐리어다. 이름에서 또 한번 짐작할 수 있듯, 과거 귀족들의 이동수단인 가마 등을 일컫는 '팔란킨(Palanquin)'에서 유래했다. 씬킹은 기본적으로 케이스백에 열쇠를 꽂아 메인 스프링을 감을 수 있는 핸드와인딩 시계이지만, 팔란킹을 결합하면 전통적인 크라운을 사용할 수 있는 두께 5.4mm 셀프와인딩 시계로 변신한다. 또한 본체를 보호해 내구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씬킹은 아직 프로토타입 단계지만 러시아 워치 메이킹을 한 단계 끌어올린 천재 시계 제작자의 비범함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Editor
유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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