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칼리버 114.
‘매뉴팩처’ 오리스
지난 2011년, 스와치 그룹의 ETA는 2019년 12월 31일까지 타사에 공급하는 범용 무브먼트의 양을 서서히 줄여 2020년부터는 완전히 중단할 예정이라 선언했다. 직간접적으로 타격을 받을 미드레인지 워치메이커는 그에 대해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로 응수했다. 당시 오리스 역시 그 행렬에 동참했다. ETA 대신 셀리타의 범용 무브먼트를 활용하던 오리스였지만, 당시 이들에게도 새로운 동력원이 필요했을 터이다. 고심 끝에 오리스가 선택한 신형 엔진은 뜻밖에도 핸드와인딩 무브먼트였다. 셀프와인딩 전성시대에 홀연히 등장한 이 무브먼트는 브랜드 창립 110주년을 맞은 지난 2014년 아틀리에 칼리버 110으로 첫선을 보였다. 당시 기념의 의미로 110개만 만들었지만 준수한 마감에 10일의 롱 파워리저브를 비롯한 성능은 업계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오리스 역시 호평에 힘입어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이듬해 날짜 창을 더한 칼리버 111을 통해 완전한 상용화를 이뤘다. 안정적인 토대가 마련된 이후부터는 거칠게 없었다. 2016년 낮밤 인디케이터와 세컨드 타임을 결합한 칼리버 112를 시작으로 지난해 풀 캘린더의 칼리버 113을 거쳐 올해 GMT 핸즈를 더한 칼리버 114에 이르렀다. 그렇게 1년에 하나씩 차곡차곡 곳간을 불려온 오리스는 이제 어엿한 매뉴팩처 브랜드로서 차기작 칼리버 115를 바라보고 있다.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칼리버 114
Ref. 01 114 7746 4164-Set 1 22 72FC
기능 시·분·초, 날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 세컨드 타임
무브먼트 핸드와인딩 칼리버 114, 21,600vph, 40스톤, 10일 파워리저브
케이스 지름 44mm, 스테인리스스틸, 100m 방수, 글라스백
가격 680만원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의 시대
그간 오리스 칼리버 시리즈는 드레스 워치에 가까운 아틀리에 컬렉션이 담당했다. 올해는 반대다. 스포츠 워치, 더 정확히는 항공시계 계열의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이 칼리버 114를 이끄는 중책을 맡았다. 해당 컬렉션에 칼리버 111 모델도 있었지만, 당시는 아틀리에 칼리버 111의 후속작이었다. 칼리버 시리즈에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을 전면에 내세운건 이번이 처음이다.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이 첫 주연을 맡은 칼리버 114는 칼리버 111에 세컨드 타임 기능을 추가한 모델이다. 칼리버 111의 균형 잡힌 다이얼 배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중앙에 GMT 핸드를 더했다.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전의 복잡한 112, 113과 달리 기능과 디자인을 적절히 타협한 결과다. 등장 시기도 절묘했다. GMT 워치가 쏟아지는 시기에 나와 선구자 중 하나로서 현재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아틀리에에서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으로 디자인 코드를 교체한 건 결과적으로 탁월했다. 칼리버 114의 큼지막한 사이즈(지름 44mm)는 드레스 워치 계열의 아틀리에보다는 아무래도 파일럿 워치 DNA의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에 더 잘 어울린다. 파일럿 워치에 따라 케이스는 폴리싱 대신 무반사의 브러시드 가공을 통해 마무리했다. 비스듬히 홈을 촘촘히 새긴 베젤과도 조화롭다. 다이얼은 블랙 바탕에 큼지막한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와 핸즈를 사용해 목적에 맞게 가독성이 뛰어나다. 야광 물질도 각각의 요소에 골고루 칠한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충분한 시인성을 보장한다. 케이스백을 가득 채우는 무브먼트는 이번 칼리버 114에서도 여전하다. 오리스 칼리버 시리즈의 볼거리 중 하나로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준수한 마감과 조작감
오리스는 가격 대비 마감이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상위 브랜드와 견주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칼리버 114는 브랜드내에서 최상위 라인이기에 피니싱에 좀 더 공을 들였을 터이다. 예상처럼 케이스와 버클의 브러시드 가공은 빈틈없이 꼼꼼하게 이루어져 있다. 러그 모서리 부분이 약간 날카로운 것만 빼면 크게 흠잡을데 없다. 다이얼의 프린팅도 루페로 봤을 때 큰 문제없이 깔끔했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와 GMT 핸즈의 붉은색이 좀 더 고급스러운 빛을 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준수한 마감만큼 조작감 역시 만족스럽다. 빅 크라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스크루 방식의 크라운은 적당히 커서 조작하기 편하다. 0단에서는 일반적인 시계처럼 와인딩을 할 수 있다. 10일의 파워리저브를 위해 1.8m에 달하는 메인 스프링을 감아야 하기에 풀 와인딩 상태에 도달하려면 제법 많이 감아줘야 한다. 저항감도 처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상으로 3일을 넘어가면 그때부터 조금의 저항감이 느껴지고, 8일을 넘으면 조금씩 뻑뻑해지는 느낌이 든다. 밸런스의 왕복 운동은 1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초침이 움직이며 시계가 작동한다. 그 상태에서 크라운을 한 번 더 뽑으면 날짜와 GMT 핸즈를 조작할 수 있다. 날짜는 크라운을 아래쪽으로 돌리면 되고, GMT 핸즈는 반대다. 시간은 일반 시계와 마찬가지로 크라운 마지막 단에서 조작하면 된다.
지름 44mm의 사이즈는 일반적인 남성이 착용하기에 크게 무리는 없다. 제품군이 파일럿 워치기에 이 정도의 사이즈는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리고 44mm는 지름 34mm의 큼지막한 무브먼트를 수납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이즈로 보인다. 그보다 더 작다면 방수를 비롯한 내구성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케이스백을 가득 채운 큼지막한 칼리버 114. 오리스 칼리버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다.
독보적인 기초 체력
현대 오리스의 5번째 인하우스 무브먼트인 칼리버 114. 기존처럼 큼지막한 싱글 배럴에 3/4 플레이트처럼 밸런스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덮는 브리지 디자인을 택했다. 브리지 표면은 전체적으로 새틴 피니싱으로 마무리했다. 시각적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내실을 다진 기계적인 미학은 충분하다. 롱 파워리저브를 비롯한 성능 역시 큰 문제없다. 수평 포지션에서 진동각은 320°나 나왔고 시계가 불안정한 수직 상태에서도 280°로 안정적이었다(270° 이상 정상). 하루 평균 오차는 COSC 인증(-4~+6초)에 버금가는 수준이지만 포지션 간의 최대 편차는 다소 컸다. 편차의 아쉬움은 기대 이상의 파워리저브가 달랜다. 공식 사양은 10일이지만 테스트 시계는 11일 하고 약 13시간이나 더 작동했다. 상위 브랜드의 롱 파워리저브 시계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여유 시간이 넉넉했다. 물론,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상에서 1일 아래로 떨어지면(10일 이후) 토크가 약해져 진동각이 줄어들고 오차가 커지는 등 시계가 불안정한 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파워리저브가 바닥에 다다르면 당연한 것이고 어느 시계나 마찬가지다. 인디케이터에 빨간색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시계가 불안정해지니 와인딩을 하라는 의미다. 칼리버 114의 공식 사양대로라면 그 시점은 8~9일이다. 반면, 실제 무브먼트는 그를 상회한 10일 내외를 기록했다. 그때 깜빡하고 와인딩 시점을 놓치더라도 시계가 멈출 일은 없다. 토크가 약해지고 어찌됐든 칼리버 114는 약 37시간을 더 작동한다. 제품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11일 이상은 갈 것으로 예상된다.
남성적인 매력의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칼리버 114.
칼리버 114의 진면모
오리스 칼리버 시리즈는 몇 년 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올해는 칼리버 114를 통해 시계 디자인도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이라는 제 짝을 찾아갔고 실용적인 세컨드 타임 기능까지 추가했다. 기존 제품처럼 베리에이션도 다양하다. 다이얼과 스트랩에 따라 총 10가지 버전이 있다. 다이얼은 그레이와 블랙 두 가지 선택지가 있고, 스트랩은 나토와 악어가죽, 스테인리스스틸 브레이슬릿으로 나뉜다. 가격은 악어 가죽 스트랩 기준으로 680만원. 나토 스랩과 브레이슬릿 버전은 각각 650만원, 670만원이다. 오리스 내에서 고가에 해당한다. 비슷한 가격대에 살 수 있는 괜찮은 제품도 주위 브랜드에 제법 있다. 그럼에도 인하우스 칼리버와 실용성을 잣대로 뒀을 때,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칼리버 114는 10일의 롱 파워리저브에 세컨드 타임이라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롱 파워리저브 시계 중에서도 10일 이상은 상당히 드물다. 미드레인지 워치메이커로 범위를 좁히면 독보적이다. 비교 대상으로 삼을 만한 마땅한 적수가 없어 보인다.
게재호
59호(2018년 11/12월)
Editor
장종균
사진
김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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