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출현
롤렉스는 2017년 바젤월드에서 눈에 띄는 모델을 출시했다. 문페이즈 기능을 가진 첼리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롤렉스와 문페이즈. 왠지 어색한 둘의 만남을 이야기하려면 1950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롤렉스는 1950년대 이전까지 획기적인 방수 능력을 자랑하는 오이스터 케이스를 활용해 드레스 워치의 범주에 속하는 심플 워치를 주로 제작했다. 컴플리케이션이라고는 프레스티지 컬렉션이었던 데이트저스트나 크로노그래프가 전부였다. 1949년 롤렉스는 돌연 트리플 캘린더와 문페이즈를 결합한 모델(제품 번호 8171)을 출시했다. 1952년까지 생산된 이 모델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크기(지름 38mm)로 인해 이탈리아어로 커다란 프라이팬이라는 뜻의 파델론(Padellon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이스터 케이스가 아닌 일반 케이스를 사용한 제품 번호 8171은 방수에 취약했다. 다이얼 12시 방향에는 브랜드명과 왕관 그리고 월과 요일을, 6시 방향에는 초침과 문페이즈를 그리고 외곽에는 날짜를 표시했다. 제작 시기에 따라 삽입한 문구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트리플 캘린더 레이아웃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초의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가 출시된 지 1년 만에 바젤 페어에서 또 다른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제품 번호 6062)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롤렉스의 전매특허인 오이스터 케이스를 적용했다. 전작과 달리 별 모양의 인덱스가 매력적인 스텔라인(Stelline) 다이얼을 사용한 과감한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제품 번호 6062). 별 모양의 인덱스로 인해 스텔라인(Stelline)이라고 불린다.
1950년대 출시한 두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케이스다. 일반적인 스리피스 케이스를 사용한 제품 번호 8171(위)과 오이스터 케이스를 사용한 제품 번호 6062(아래).
달의 몰락
롤렉스는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를 1950년대 초중반까지만 생산하고 단종시켰다. 이후 문페이즈는 롤렉스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이 두 모델은 롤렉스 역사상 가장 고귀한 시계 중 하나로 등극했다. 짧은 기간 동안 소량 생산했다는 점, 브랜드 역사상 유례 없는 컴플리케이션이라는 점이 많은 수집가를 자극했다. 특히 보존 상태가 양호한 스테인리스스틸 버전의 경우 경매 시장에서 골드 버전의 가격을 훨씬 웃돌곤 한다. 유명 컬렉터인 존 골드버거(John Goldberger)는 데일리 워치였던 스테인리스스틸 버전의 경우 보관이나 관리를 소홀히 해 상태가 좋은 시계를 찾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고, 이것이 가격을 높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롤렉스는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고,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를 롤렉스의 전략적 변화에서 찾고 있다. 1953년 롤렉스는 익스플로러, 턴오그래프, 서브마리너를 출시했고, 이후 지엠티-마스터와 밀가우스를 연이어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프로페셔널 모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양한 디자인이 난립했던 케이스는 오이스터 케이스로 단순화했고, 드레스 워치는 오이스터 데이트, 데이트저스트, 데이-데이트로 제한했다. 롤렉스의 길은 명확했다. 복잡한 기능을 배제하고 실용성과 정확성을 갖춘 시계야말로 자신들이 나아갈 미래였던 것이다.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필립스 경매에서 롤렉스 시계 역대 최고 낙찰가 기록을 경신한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제품 번호 6062).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Bao Dai)의 소장품으로, 해당 레퍼런스에서 단 3개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다이아몬드 마커 블랙 다이얼 중 짝수 시간에 다이아몬드 마커를 적용한 유일한 모델이다. 낙찰가는 506만6000스위스프랑(약 56억8000만원).
현재 20개 남짓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 스테인리스스틸 버전(제품 번호 6062).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필립스 경매에서 낙찰된 이 시계의 가격은 193만 스위스프랑(약22억4900만원)이다.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제품 번호 8171). 오이스터 케이스가 아닌 관계로 다이얼에 ‘OYSTER’ 표기가 빠져있다.
다시 떠오른 달
첼리니 문페이즈는 제품 번호 8171과 6062 이후 처음으로 등장한 롤렉스의 3번째 문페이즈 시계로, 날렵한 도핀 핸즈와 바 인덱스에 날짜와 문페이즈 기능을 더한 스몰 컴플리케이션이다. 지름 39mm의 에버로즈 골드 케이스는 현대 드레스 워치의 크기로 적당하고, 플루티드 베젤과 날렵한 러그는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문페이즈다. 서브 다이얼 아래에서 회전하는 디스크를 통해 달이 차고 기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보름달과 신월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남반구와 북반구에서 바라본 달을 모두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작은 화살표를 통해 달의 현재 모습을 추상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달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시계에서 달의 모습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표현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롤렉스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페이즈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파란색 에나멜 디스크 위에 떠있는 보름달은 운석을 로듐으로 도금한 것이다. 시침 아래 꽂혀있는 파란색 바늘은 다이얼 외곽에 새긴 날짜를 표시한다. 스몰 컴플리케이션을 구동하는 매뉴팩처 칼리버 3195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확실한 건 롤렉스의 다른 시계처럼 하루에 ±2초의 오차만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페셔널 모델의 정확성과 완벽함을 첼리니 문페이즈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건 롤렉스 드레스 워치가 가진 힘이다.
2017년에 출시한 첼리니 문페이즈. 블루 에나멜 다이얼 위로 운석으로 만든 보름달이 떠있다. 롤렉스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문페이즈를 해석했다.
새로운 달의 의미
달이 다시 떠오르기까지 6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시계는 드레스 워치의 정석을 따르고 있지만 펑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롤렉스는 에나멜 다이얼과 운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복잡한 공정 과정과 높은 비용을 수반하는 에나멜과 운석은 연간 80만 개의 ‘실용적인’ 시계를 대량 생산하는 롤렉스의 가치에 반하는 소재다. 이는 전체 판매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첼리니 컬렉션이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독특한 소재보다 더 주목할만한 것은 레이아웃이다. 현재 판매중인 롤렉스 시계 중에서 유일하게 다이얼 외곽에 새긴 날짜를 바늘로 가리키는 방식이다. 이는 1950년대 롤렉스의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헤리티지 모델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다. 롤렉스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이 시계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롤렉스가 늘 그래왔듯이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드레스 워치 라인업 확장을 위한 시도일 수도 있고, 과거 모델에 대한 오마주일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이 시계가 롤렉스적이면서도 롤렉스답지 않은,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드레스 워치라는 것이다.
게재호
51호(2017년 07/08월)
Editor
이재섭
사진
롤렉스, 필립스(PHILL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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