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시계 산업의 구세주 ㅣ 니콜라스 하이에크
NICOLAS G. HAYEK(1928~2010)
Achievement
스위스 시계 업계를 위기에서 되살려냄. 스와치 그룹을 완성.
Biography
1928년 레바논 베이루트 출생. 1963년 하이에크 엔지니어링 설립. 1982년 SSIH와 ASUAG를 합병하여 SMH설립. 1983년 스와치 발표.
1985년 SMH의 지분 51% 확보. 1998년 SMH는 스와치 그룹으로 사명 변경.
스와치, 스위스 시계의 재도약
세컨드 워치(Second Watch)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지만 스위스 워치(Swiss Watch)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플라스틱 시계. 니콜라스 하이에크에 대한 이야기는 스위스 시계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이 시계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쿼츠 시계는 ‘시계’가 가진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었다. 시계가 전자제품처럼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스위스 시계 업계 또한 뒤늦게 쿼츠 시대로의 전환을 꾀했지만 먼저 쿼츠를 상용화한 라이벌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저가 정책을 펼치며 파상공세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당시 ETA의 CEO인 에른스트 돔케는 ETA의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아주 단순한 구조의 쿼츠 무브먼트를 대량 생산해 패션성을 더한 워치를 만들기로 계획했고, 하이에크는 과감하게 이를 실행에 옮겼다. 니콜라스 하이에크가 로엔드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누구던가. 네슬레와 지멘스, 폭스바겐 등을 고객으로 둔 컨설팅 회사를 운영할 만큼 수완가인 그는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겠다고 나섰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투자자를 모아 펀드를 조성했고, SMH(Société Suisse de Microelectronique et d’Horlogerie)의 지배지분 51%를 확보했다.
스와치 시계 최초의 프로토타입.
초기에 스와치가 세컨드 워치라고 자신들을 광고한 이유는 시계를 지금의 자라나 H&M 같은 패스트 패션으로 받아들이길 원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1983년 당시 가격으로 35스위스프랑 정도에 출시된 이 저렴한 쿼츠 시계에는 ‘스타일’이 있었다. 톡톡 튀는 컬러감과 감성적인 디자인. 시즌마다 선보이는 새로운 모델은 이슈를 끌어냈다. 1985년부터는 선구적으로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했는데, 오노 요코나 키스 해링,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이름을 건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인 것. 한정판 스와치는 현재 저명한 옥션 하우스에서 수천, 수만 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구원자로 나서다
1980년대 초반 스위스 시계업계는 프랑스어권의 SSIH(Societé Suisse de l’Industrie Horlogère)와 독일어권의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의 두 거대 회사가 양분하고 있었다. 전자는 시계 생산에, 후자는 에보슈나 부품 생산에 집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둘의 공통점은 파산에 가까운 재정상태라는 것이었다. 1980년 SSIH는 1억 3천만 스위스프랑의 손실을 냈고, 은행은 기업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그 두 배가 넘는 자금을 투입해야했다. 스위스 연방 은행과 스위스 은행(둘이 합병된 현재는 UBS)은 위기에 빠진 스위스 시계 산업을 진단할 적임자로 하이에크를 지명한다. 그는 분석 끝에 SSIH와 ASUAG 합병을 제안했다. ASAUG의 산하에는 ETA와 니바록스처럼 시계 제조의 핵심을 생산하는 회사와 론진, 라도와 같은 브랜드가 있었다. SSIH는 오메가와 티쏘를 소유하고 있었다. 스위스 시계 산업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오메가와 론진의 브랜드 가치는 여전히 상당했으므로, 이 두 거대 기업의 합병이 가져올 시너지 효과는 기대할 만했다. 1982년 12월 합병이 마무리되고 SMH가 출범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았고,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어야 했다. 그리고 은행의 의뢰를 받아 컨설턴트로 일하던 하이에크는 1985년 지분의 51%를 확보하면서 SMH의 CEO 겸 회장에 오른다.
19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콤머즈 뱅크에 내걸린 13톤짜리 초대형 스와치. 하이에크는 일본 도쿄의 아크 모리 빌딩에도 같은 형태로 스와치를 걸었고, 이는 일본의 쿼츠에 스위스의 쿼츠로 대응한 일종의 ‘도발’로 기억된다.
시계 피라미드 체계의 완성
1983년 100만 개 남짓한 스와치의 생산량은 1986년에는 1000만 개, 1990년에는 다시 그 두 배가 넘는 수치에 도달했다. SMH는 스와치의 성장과 함께 거대한 청사진을 서서히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산하의 ETA와 R&D회사의 개발· 생산 능력을 기반으로 힘을 얻은 SMH는 소유한 브랜드에 대한 체계를 잡아갔다. 그룹 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오메가의 라인업을 정리하고, 마케팅을 통해 고급 시계의 이미지를 다시 구축하고자 했다. SHM은 1984년을 기점으로 흑자 전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SMH의 성적은 스위스 시계업계의 회복, 성장의 그래프와 일치한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난 스위스 시계업계는 기계식 시계의 르네상스를 막 코앞에 두고 있었다. SMH는 1992년 SSIH시절 장 클로드 비버에게 매각한 블랑팡을 다시 인수한다. 그리고 1999년에는 브레게를 인수했고, 브레게를 매뉴팩처로 만들기 위해 누벨 르마니아와 손을 잡는다. 로엔드에서 하이엔드까지 폭넓은 무브먼트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에보슈 메이커 르마니아는 브레게의 날개가 되었다. 하이에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00년 글라슈테 오리지널과 자케 드로를 흡수해 하이엔드 브랜드 카테고리를 강화했다. 저가의 스와치부터 고가의 브레게와 블랑팡까지. 그 중간에는 오메가를 두어 브랜드 간의 간섭을 최대한 피하면서 가격대별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체계를 완성한 것. 이 강력한 피라미드 구조는 리치몬트 그룹이나 LVMH의 시계부문과 사뭇 다르다.
시계 산업을 뒤흔들 초강수
스위스 시계업계가 호황을 누리는 가운데, 2002년 하이에크는 돌연 2006년부터 ETA의 에보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다. 승승장구하던 시계업계에 찬물을 끼얹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는 결국 스위스 연방 법원의 중재로 2010년으로 미뤄진다. ETA의 시장 지배력을 강화해 경쟁자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자 한 그의 의도는 동시에 스위스 시계 전체를 위한 극단의 조치이기도 했다. 하이에크는 생전 ETA가 공급하는 에보슈가 시계업계를 되레 망치고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ETA 무브먼트로 인해 시계를 손쉽게 만들어 파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기획과 디자인만 할 뿐 생산 일체가 외주에서 이뤄지니, 브랜드는 난립하지만 정작 그 이면의 창조성은 사라진 것. 이는 곧 스위스 시계 전체의 품질을 하락시켜 다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ETA의 공급 제한이 가져온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은 각 브랜드의 인하우스 무브먼트 생산이 가속화됐다는 정도다. 하이에크가 기대한 것은 아마도 쿼츠 위기 이전의, 개성 넘치는 매뉴팩처의 시대였겠지만 반면 작은 규모의 브랜드는 그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하이에크를 비난하기도 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추진력 역시 ‘독재자’라는 별명을 그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스위스 시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양손에 몇 개씩, 분신처럼 스와치 그룹의 시계를 차고 다니던 생전의 모습은 그의 인생에서 시계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돌연 심부전으로 사망한 순간에도 그는 사무실에 있었다고 한다. 스위스 시계업계의 구세주 하이에크는 인생의 마지막까지도 시계를 위해 바쳤다.
전무후무한 시계 디자이너 ㅣ 제랄드 젠타
GERALD GENTA(1931~2011)
Achievement
대표작 로얄 오크를 비롯해 하이엔드 스포츠 워치 디자인의 방법론을 제시, 기하학적 도형을 시계 디자인에 융화시킴.
Biography
1931년 스위스 제네바 출생. 1961년 독립 워치 디자이너가 됨. 1968년 파텍 필립 골든 엘립스 디자인. 1969년 자신의 회사 설립.
1972년 오데마 피게 로얄 오크 디자인. 1976년 IWC 인제니어SL, 파텍 필립 노틸러스. 1977년 불가리 불가리불가리 디자인.
1994년 제랄드 젠타 그랑 소너리 탄생. 2001년 제랄드 찰스 설립.
시계업계에는 콧수염 하면 떠오르는 두 명이 존재한다. 제랄드 젠타와 알랑 실버스타인, 두 사람 모두 워치디자이너이면서 도형으로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랑 실버스타인과는 분명히 다르게, 제랄드 젠타에게는 그저 ‘워치디자이너’라는 수식어가 부족하기만 하다. 그의 업적은 그 이전과 이후의 어떤 디자이너도 이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시계 디자인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역사적인 모델의 상당수가 그로부터 탄생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작품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시계디자이너로서의 시작
그는 스위스로 이주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스위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계대전에 휘말린 유럽에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학교에서마저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전쟁의 주범인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주얼리로 진로를 잡고 대형 주얼러의 도제로 들어갔지만 스승과의 마찰을 겪고 난 후 누군가의 아래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그는 주얼리 대신 시계를 통해 삶을 지탱하고자 했다. 그는 무턱대고 시계 스케치를 시작했으며, 자신의 스케치를 팔기 위해 여러 시계 브랜드를 닥치는 대로 찾아 다녔다. 그가 디자이너로서 걸음마를 떼게 해준 작품은 유니버설 제네바의 ‘폴루터(Polerouter)’다. 지금의 유니버설 제네바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으며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인하우스 마이크로로터 무브먼트로 새로운 시작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탄탄한 인지도를 자랑하는 브랜드였다. 유니버설 제네바의 대표적 모델로 회자되는 폴루터는 바로 20대 약관의 젊은이였던 제랄드 젠타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의 1960년대 작품들로는 오메가의 컨스텔레이션(일명 컨스텔레이션 C라인), 파텍 필립의 골든 엘립스가 있다.
1972~1979년, 제랄드 젠타 디자인의 완성
1969년 자신의 회사를 세운 제랄드 젠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계 디자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72년 스포츠 하이엔드 워치의 장르를 연 로얄 오크. 이는 오데마 피게뿐 아니라 제랄드 젠타에게도 중요한 시계가 된다. 오데마 피게의 미래와 방향을 이 시계 하나가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일명 ‘제랄드 젠타의 3부작’이라고 부르는 3개의 모델- 로얄 오크, 노틸러스(파텍 필립, 1976년), 인제니어SL(IWC, 1976년)-과 불가리의 대표 모델이 된 불가리불가리(1977년)에는 디자인의 공통된 요소가 존재한다. 우선 러그가 있으면서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점(현대의 불가리불가리와 달리 제랄드 젠타의 스케치에는 러그 없이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이 바로 연결된다). 이로 인해 마치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완성하며, 이는 실제로 착용했을 때 더 분명해진다. 기하학 도형을 시계 디자인에 과감히 도입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로얄 오크는 팔각형의 베젤에 8개의 스크루를 사용했고, 세이코 크레도르 로코모티브(1979년)는 육각형 베젤을 6개의 스크루로 고정한(인제니어SL에는 베젤에 스크루 대신 시각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5개의 홀을 넣었음)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어떤 시계 디자인에서도 볼 수 없는 부분이었고 이것은 그의 시계 인생 후반부에 선보인 ‘제랄드 젠타’ 워치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로얄 오크의 구조도 및 1972년 당시의 오리지널 모델
앞서도 언급했지만, 제랄드 젠타 디자인의 영향력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요르그 하이섹(Jorg Hysek)은 제랄드 젠타에 비견될 정도의 디자이너로 브레게의 마린을 비롯해 까르띠에와 에벨 등의 시계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1977년 20대의 그가 디자인한 ‘222’는 바쉐론 콘스탄틴의 222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공식적인 첫 번째 스포츠 워치였다(222는 여전히 누구의 디자인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최근에는 제랄드 젠타가 아니라 요르그 하이섹이라는 주장이 더 강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엇갈리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을 했건 요르그 하이섹이 디자인을 했건 간에 확실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디자인이 제랄드 젠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제랄드 젠타 전성기의 대표작 로얄 오크가 제시한 방법론을 222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울트라 슬림 베이스 무브먼트(예거 르쿨트르 칼리버 920)를 사용했고, 케이스 백이 없는 형태로 우수한 착용감을 해치지 않는 모노 코크 케이스라는 점 그리고 케이스에서 바로 브레이슬릿으로 연결되는 유사한 실루엣에서 제랄드 젠타의 그림자를 느끼게 된다. 제랄드 젠타가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완성한 마지막 디자인은 까르띠에의 파샤 드 까르띠에(1985년)다. 까르띠에의 대표적 라인업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이 모델은 독특한 크라운 커버를 갖추고 있다. 평상시에는 크라운이 보이지 않다가 카보숑 장식이 된 커버를 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충분히 장식적일 뿐만 아니라 크라운을 보호하는 기능까지 기대할 수 있다.
옥타곤 또는 옥토의 시대
본격적으로 ‘제랄드 젠타’라는 이름을 단 시계가 눈에 띄는 시점은 1990년대다. 1972년 제랄드 젠타의 이름으로 콴티엠 퍼페추얼이 나왔다고는 하나 이에 대한 자료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빈티지 모델의 추정연대로 보건대 제랄드 젠타 컴퍼니에서 매뉴팩처링을 하게 된 시점은 1990년대, 그 이전에는 디자인 하우스로서의 역할이 더 컸던 것 같다. 제랄드 젠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열쇠는 팔각형이다. 오데마 피게 로얄 오크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진 팔각형 디자인은 잠수함 노틸러스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팔각형으로 이어진다. 그보다 초기 디자인인 골든 엘립스는 황금비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희미하게나마 케이스에서 팔각형을 그려낼 수 있다. 이후 자신의 브랜드 제랄드 젠타에서는 원을 아예 배제한 형태의 강렬한 팔각형 디자인을 선보인다. 팔각형 베젤에 라운드 다이얼인 로얄 오크나 원에 가까운 팔각형을 그리는 노틸러스와 달리 아예 팔각형 그 자체였다. 원, 삼각형, 사각형을 크로노그래프의 푸시버튼이나 핸드 같은 작은 부품에 사용한 알랑 실버스타인과 달리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은 팔각형을 강조하는 대담한 디자인이다. 팔각형은 그의 디자인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그 비중이 큰데, 제랄드 젠타가 집요하리만치 팔각형을 자신의 디자인 모티브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어찌됐건 팔각형은 제랄드 젠타의 정체성과 유니크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다. ‘제랄드 젠타’의 옥토 라인업은 팔각형 모티브 시리즈의 완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평면 형태의 팔각형에서 마치 계단을 층층이 쌓아 올린 듯한 그랑 소너리(1994년)는 당시의 제랄드 젠타를 대변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옥토의 독특한 디자인 속에는 갖가지 컴플리케이션이 탑재되었는데 이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1976년 탄생한 제랄드 젠타의 역작, 파텍 필립 노틸러스. 러그와 케이스가 통합된 형태에서 로얄 오크를 연상할 수 있다.
베젤에 스크루 대신 시각적으로 비슷한 효과를 주는 5개의 홀을 넣은 인제니어 SL.
후기 ‘제랄드 젠타’에서는 팔각형 케이스에 다이얼에 다시 팔각형을 겹치거나 다양한 도형을 올려놓는 것으로 캐릭터를 창조했다. ‘제랄드 젠타’에서 브랜드가 주요하게 사용한 기술은 당시엔 비교적 생소한 레트로그레이드였다. 이것이 다이얼에 활기를 불어넣는 방식임은 분명하다. 판타지 시리즈의 미키 마우스의 골프채와 도날드 덕의 야구 방망이가 매 시간 0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선택한 이유는 역시 확실하지 않지만, 어쩌면 레트로그레이드가 그려내는 반원의 도형을 제랄드 젠타가 선호했을지도 모른다. 레트로그레이드는 옥토뿐 아니라 게피카(Gefica), 아레나 같은 라인업에 폭넓게 사용된다. 아쉽게도 브랜드 ‘제랄드 젠타’는 1996년 싱가포르의 아워 글라스 그룹에 다니엘 로스와 함께 매각되었다가 2000년 불가리로 재매각된다.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제랄드 젠타는 2001년 매각을 한 탓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브랜드 ‘제랄드 젠타’ 대신에 새로운 브랜드 ‘제랄드 찰스’를 설립한다(찰스는 그의 미들 네임이다). 2006년 그는 ‘제랄드 찰스’를 바젤월드에 선보이며 시계업계로 다시 복귀한다. 제랄드 찰스 시절의 디자인은 그간 보여준 유니크함이 살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소 생소했다. 그 변화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2011년 8월 제랄드 젠타는 시계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명작들을 남기고 먼 길을 떠났다. 제랄드 젠타의 마지막 작품인 ‘제랄드 찰스’는 여전히 숨쉬고 있으며, ‘제랄드 젠타’는 불가리의 라인업으로 남아 지금도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현자 ㅣ 귄터 블륌라인
GÜNTER BLÜMLEIN(1943~2001)
Achievement
럭셔리 워치메이킹 부활의 발판을 마련.
Biography
1943년 독일 누렘베르크 출생. 1977년 융한스 세일즈, 마케팅 디렉터 취임. 1982년 IWC 사장 취임 1984년 예거 르쿨트르 회장 취임.
1990년 랑에 운트 죄네 재설립. 1994년 랑에 1, 삭소니아, 아케이드, 투르비용 ’푸르 르 메리트’ 발표. 1999년 다토그래프 발표. 2001년 본사 공방 복원.
2012년 SIHH에서 그랑 랑에 1의 변화는 의미 심장했다. 트윈 배럴에서 싱글 배럴로 변경해 72시간의 파워리저브를 구현한 그랑 랑에 1은 랑에 운트 죄네의 재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을 떠오르게 했다. 귄터 블륌라인, 그는 독일 시계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인생의 후반부를 건 인물이었다. 그는 랑에 운트 죄네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미적 가치’에 두었고, 그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살아생전 그랑 랑에 1의 트윈 배럴을 못마땅해한 건 그런 이유에서 기인했다. 프리스프렁 방식보다는 레귤레이터 방식을 선호한 것도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눈부신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IWC와 예거 르쿨트르, 독일 시계의 거인 랑에 운트 죄네는 모두 이 남자, 귄터 블륌라인에 의해 어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귄터 블륌라인의 커리어는 역시 그의 고향 독일에서 출발했다. 누렘베르크를 기반으로 한 그룹 딜(Diehl)에서 인턴 기간을 끝내고, 대학에 들어간 그는 기계 공학 학위를 땄다. 다시 회사로 돌아간 그는 당시 딜 그룹 산하에 있는 브랜드 융한스에 들어가 엔지니어이자, 품질 관리를 관장하는 최고 담당자로 일하게 된다.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매뉴팩처를 자랑하는 융한스에서 그는 시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세일즈·마케팅 디렉터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던 차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LHM(Les Manufactures Horologères)는 독일 회사로 VOD그룹에 속해 있었다. LHM은 다시 기계식 시계가 부활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이때를 대비해 회사를 이끌어갈 적임자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귄터 블륌라인은 운명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IWC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다
세이코가 일군 쿼츠의 상용화(1969년)는 기계식 시계에 엄청난 치명타를 가했다. 기계식 시계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수 많은 워치메이커는 생산 설비를 처분하고 문을 닫았다. 1970년대 내내 혹독한 시절은 지속됐다. 스위스의 그 어떤 브랜드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IWC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회사의 구성원 대부분이 떠났고, 커트 클라우스가 홀로 간신히 개발팀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IWC는 결국 LMH에 인수합병되었다. 그러나 귄터 블륌라인이라는 수장을 맞이한 IWC는 희망의 불씨를 찾을 수 있었다. 귄터 블륌라인은 대중에게 기계식 시계가 지닌 매력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데이트 메커니즘의 최고봉인 퍼페추얼 캘린더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런 결정은 미적인 부분뿐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커트 클라우스는 블륌라인의 지시에 의해 다 빈치 퍼페추얼 개발에 돌입했고, 4년에 걸쳐 이를 완성했다. 바젤 85(현 바젤월드)에서 처음 선보인 다 빈치 퍼페추얼은 기계식 컴플리케이션 워치의 가치와 실용성 모두를 획득한 시계라는 찬사를 받았다. 블륌라인은 재정적으로 곤경에 빠진 IWC를 구원하기 위해 포르쉐 디자인과도 손을 잡았다. 물론 이는 ‘디자인’이라는 가치를 기계식 시계에 대입한 하나의 시도이기도 했다. 1978년 컴퍼스 워치로 시작한 IWC의 포르쉐 디자인 시리즈는 오션(Ocean)에 이르러서는 그 방수성을 인정받아 서독군에 공급되기도 했다. 서독군의 밀리터리 스펙에 맞춰 납품한 오션 모델은 빈티지 시장에서 여전히 가치가 높다.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한 인제니어SL 또한 블륌라인 지휘하에 있던 IWC의 성과물이다. 1993년 발표한 포르투기즈 주빌리는 정체되어 있는 포르투기즈 라인에 새로움과 활력을 찾아주었다. IWC의 중추를 이루는 포르투기즈와 고공 행진을 하고 있는 파일럿 워치의 주요 라인업은 귄터 블륌라인에 의해 다져졌다.
IWC 125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포르투기즈 주빌리 워치. 포르투기즈 라인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예거 르쿨트르
IWC와 함께 LHM의 지붕 아래 있던 예거 르쿨트르는 이전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에보슈를 공급하던 매뉴팩처로서의 위용을 잃은 예거 르쿨트르는 시계와 관련 없는 분야의 물품까지 생산하고 있었다. OEM 생산의 펜, 라이터, 측량기기 등을 만들며, 시계에 있어서는 방향을 상실한 라인업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IWC와 예거 르쿨트르의 지분 전부를 가지고 있던 LHM은 오데마 피게에 예거 르쿨트르 지분의 40%를 매각하는 과감한 결정을 단행한다(오데마 피게는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 2000년 초반까지 전적으로 예거 르쿨트르에서 에보슈를 공급받았다. 오데마 피게의 핵심 자동 무브먼트의 베이스가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889시리즈였으며, 인하우스 칼리버 2120 또한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920을 베이스로 한다). 지분 매각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성장 동력을 마련한 귄터 블륌라인은 예거 르쿨트르 라인업을 총체적으로 개편한다. 지금 예거 르쿨트르의 중심 라인업이 된 리베르소와 마스터 시리즈, 아트모스는 모두 블륌라인의 손을 거쳐서 제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블륌라인은 예거 르쿨트르의 라인업을 총체적으로 개편했다. 주요 라인업은 제 역할을 찾았고 리베르소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아르데코 스타일의 리베르소 그랑테일.
독일 하이엔드 시계의 부활
1945년 이후 독일의 시계 산업은 실질적으로 정체기를 맞이한다. 랑에 운트 죄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본사 공방이 폭격을 맞아 완파되었고, 분단 후에는 동독의 시계 산업 국영화 정책에 의해 그 전통과 명맥이 중단되었다. 동독 체제에서 UROFA(에보슈 제조주식회사), UFAG(시계 제조주식회사), 랑에 운트 죄네는 GUB(글라슈트 국영시계공업)로 통합된다. 한편 랑에 운트 죄네 창립자의 후손인 발터 랑에는 회사를 빼앗긴 후 서독으로 탈출한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독일 출신인 귄터 블륌라인이 독일 시계의 전통이 살아 숨쉬던 시절로의 회귀를 꿈꾼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는 월터 랑에와 함께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한 도전을 결심한다. 그는 먼저 GUB와 접촉했지만 너무 비대해진 국영기업을, 그것도 쿼츠 쇼크로 인해 가동을 거의 중단한 회사를 인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통독 직후인 1990년, 블륌라인은 랑에 운트 죄네의 브랜드 네임을 정식 등록했고, 1994년 비로소 랑에 운트 죄네는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다. 랑에 1, 삭소니아, 아케이드, 푸르 르 메리트에는 독일 전통을 계승하려는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3/4플레이트와 브라스로 만든 브리지, 저먼 실버 소재(로듐 도금 플레이트를 사용하는 스위스 시계와 차별화됨) 등에 반영되었다. 마치 무브먼트 위에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요소들-골드 샤통과 블루 스크루, 섬세한 밸런스 콕의 인그레이빙과 스완넥 레귤레이터, 클래식한 밸런스 휠-은 랑에 운트 죄네의 시계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블륌라인은 랑에 운트 죄네식 미학을 완성하기 위해 IWC의 인력을 십분 활용했는데, 특히 샤프하우젠은 독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접근성이 용이했으므로 주도면밀하고 효율적인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랑에 운트 죄네 역시 블륌라인의 철학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실용적 가치 추구에 대한 경향 또한 명확했다. 날짜가 한눈에 들어오는 ‘빅 데이트’, 크라운을 당겨 뽑으면 초침이 0으로 돌아가 정확하게 시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한 ‘제로 리셋 메커니즘’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랑에 운트 죄네가 선도한 이러한 일련의 기술은 다른 브랜드에도 강한 영향을 미친다. 1999년에 발표한 캐링암 방식의 클래식한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스위스의 하이엔드 브랜드조차 이루지 못한 분야였다. 보통 에보슈로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완성하는데, 랑에 운트 죄네는 독일 전통의 3/4 플레이트 위에 독일식 아름다움을 곁들인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완성해낸 것이다.
랑에 운트 죄네 카바레. 디지털 방식의 숫자 표기를 보여주는 빅 데이트는 랑에 운트 죄네가 손목시계에 구현한 이후,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3/4 플레이트, 밸런스 콕의 인그레이빙, 골드 샤통 등 독일시계의 특징을 구현한 카바레 무브먼트 L931.3.
이제 귄터 블륌라인이 회생시킨 브랜드는 화려한 전성기를 앞두고 있었다. IWC와 예거 르쿨트르, 랑에 운트 죄네를 거느렸던 LHM이 지금의 리치몬트 그룹에 매각되면서 블륌라인 또한 리치몬트 소속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스스로가 되살린 기계식 시계의 미래를 지켜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백혈병과의 싸움에서 진 그는 2001년 10월 1일 58년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율리스 나르당의 구원 투수 ㅣ 루드비히 외슬린
LUDWIG OECHSLIN(1952~)
Achievement
손목 위 우주를 완성한, 천문 컴플리케이션의 모범을 선보임. 퍼페추얼 캘린더 메커니즘의 진화를 꾀함.
Biography
1952년 이탈리아 가비체 마레 출생. 1985년 아스트롤라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 1988년 플레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 1992년 텔루리움 요하네스 케플러.
1996년 날짜를 뒤로 돌릴 수 있는 퍼페추얼 캘린더. 1999년 GMT±퍼페추얼 캘린더. 2001년 라쇼드퐁 국제 시계 박물관장 취임.
한 브랜드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인물’이 그 중심에 있게 마련이다. 율리스 나르당이라는 브랜드의 색깔, 즉 기술 중심의 혁신적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루드비히 외슬린 박사다. 1980년대 초반 CEO인 故 롤프 슈나이더는 브랜드의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중 우연히 들른 시계점에서 괘종 형태의 아스트롤라비움 클락과 마주치게 된다. 롤프 슈나이더는 아스트롤라비움 클락을 손목시계 사이즈로 소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제작자인 외슬린 박사를 만난다. 외슬린 박사와 율리스 나르당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외슬린 박사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바젤과 베른의 대학에서 철학, 고고학, 고대역사, 천문학, 이론 물리학을 전공한 후 마스터 워치메이커와 복원가로 활동하기 위해 견습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1985년, 그는 아스트롤라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로 명명된 모델을 세상에 내놓는다. 외슬린의 ‘천문 3부작’은 그렇게 출발했다. 이 모델은 지구로부터 보이는 태양과 달, 별의 위치를 40mm에 불과한 다이얼 안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일식과 월식 시간까지 표시된다. 천문 3부작은 플레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1988년), 텔루리움 요하네스 케플러(1992년)로 이어진다. 이들은 다이얼 위에 우주를 투영한 유니크한 시계치고는 매우 평범하게도, 범용 칼리버인 ETA 2892를 베이스 무브먼트로 사용했다. 극도로 복잡한 메커니즘을 무난한 형태로 완성했다는 측면에서 이 시리즈를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천문 3부작’. 왼쪽부터 텔룰리움 요하네스 케플러, 플레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 아스트롤라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
친절한 퍼페추얼 캘린더
1996년 선보인 퍼페추얼 루드비히라고 부르는 퍼페추얼 캘린더는 그 콘셉트가 매우 친절하다. 보통 4년에 1주기인 퍼페추얼 캘린더는 31일에 1회전하는 일반적인 데이트 메커니즘의 시계와 달리, 날짜 조정 시(시계가 멈출 경우에) 잘못 돌리면 날짜가 다음 달로 넘어가버 리는데, 퍼페추얼 루드비히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날짜를 뒤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손목시계의 시대를 놓고 본다면, 퍼페추얼 루드비히 이전에는 거의 7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간단히 뒤로 돌릴 수 있는’ 퍼페추얼 캘린더가 나온 적이 없다. 예민하고 섬세한 메커니즘인 퍼페추얼 캘린더에 뒤로 돌리는 기능을 추가한 것이야말로 메커니즘의 성격 자체를 처음으로 바꾼 셈이다. 외슬린 박사는 퍼페추얼 루드비히 이후 3년 만에 GMT 기능을 더한 GMT ± 퍼페추얼을 선보이는데 날짜변경선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 심지어 해가 바뀌는 12월 31일이더라도, 날짜와 연동해 해당 타임존으로 시간을 표시하는 퍼페추얼 캘린더다.
괴물의 단단한 심장
크라운이 없음. 케이스 앞과 뒤의 베젤을 돌려 시간을 조정하고 와인딩하는 유니크함. 시침 역할을 하는 투르비용-카루셀을 장착한 기묘한 형태의 프릭(Freak: 괴물)은 등장과 동시에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율리스 나르당의 실험실’로 불리는 이 괴물은 지속적으로 신모델을 선보였는데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핵심 파트인 이스케이프먼트 등에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이다. 루드비히 외슬린의 파격적인 시도가 이뤄진 시점은 2007년, ‘프릭 28,800vph 다이아몬드 하트’의 다이아몬드 듀얼 이스케이프먼트를 실리슘에 다이아몬드 코팅을 한 ‘프릭 다이아몬드 실’로 바꾼 무렵으로 볼 수 있다. 율리스 나르당이 실리시움 개발과 응용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리시움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루드비히 외슬린의 공이 크다. 2011년 바젤월드에서 새롭게 공개된 인하우스 칼리버 118은 프릭과 같은 실험 모델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를 집약한 것으로, 실리시움 헤어스프링과 다이아몬실 이스케이프먼트를 대량 생산용 자동 무브먼트에 장착했다. 이는 생산 규모에 따라 율리스 나르당의 컬러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2001년 취임한 라쇼드퐁의 국제 시계박물관의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전히 율리스 나르당과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나누고 있는 루드비히 외슬린 박사. 박물관 관장직에서 조만간 아쉬운 은퇴를 예고하고 있지만 그의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탄생된 시계는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다.
케이스의 베젤을 돌려 시간을 조정하는 투르비용 카루셀 ‘프릭’. 사진은 2010년 선보인 프릭 디아블로.
게재호
20호(2012년 05/06월)
글
구교철(타임포럼 편집장)
Editor
크로노스 편집부
© Sigongsa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All rights reserved. © by Ebner Media Group GmbH & Co. KG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