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s
재도약을 위한 준비
일본산 쿼츠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이 스위스에서 일기 시작한다. ‘스와치’를 필두로 한 스위스산 쿼츠다. 한편 문을 닫은 기계식 시계 브랜드는 깊은 동면에서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1983
스와치 쿼츠
스위스 워치를 의미하는 스와치(세컨드 워치란 뜻이다). 당시 35스위스프랑 정도의 큰 부담 없는 가격, 패션 아이템으로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 결과는 성공. 이로 인해 스위스 시계 부활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1983년 모델 역시 우리가 현재 접하는 스와치의 이미지 그대로다. 스와치 매장에 가면 다양한 디자인과 컬러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한참을 망설인다. 또 분기마다 쏟아지는 새로운 모델은 선택을 더욱 어렵게 한다. 곧 30주년을 맞이하는 플라스틱 시계 스와치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성장했으며, 이것이 모여 스위스 시계를 살려냈다.
어둡고 긴 터널이었던 1970년대를 지나 스위스 시계는 1980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폐업, 흡수와 합병을 통해 이뤄진 두 개의 세력, 오메가, 티쏘와 같은 브랜드 중심의 SSIH(Societé Suisse de l’Industrie Horlogère)와 ETA, 니바록스 같은 시계 생산의 핵심 회사를 산하에 둔 ASUAG(Allgemeine Schweizerische Uhrenindustrie AG)는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은행의 의뢰로 나온 기업 컨설턴트 니콜라스 G. 하이에크는 이를 해결하고자 조사에 착수한다. 하이에크는 보고서에 두 회사의 통합으로 시너지를 이끌어낼 것을 제안했고, 이후 일본, 홍콩에서 대량생산되는 쿼츠에 쿼츠로 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은행은 쿼츠를 생산하자는 의견에 반발했고, 하이에크는 펀드를 만든다. 하이에크는 통합 후 이름을 SMH로 바꾼 두 회사의 지배 지분을 확보하며 회장 자리에 오른다. 그 이전 스와치로 명명된 저렴한 쿼츠 시계가 디자인과 패션이라는 옷을 입고 발표되었고, 이 전략은 시장에서 보기 좋게 적중한다. 매년 큰 성장을 거듭한 건 물론이다.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 시계를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카시오의 대표작. 1981년 결성된 ‘프로젝트팀 터프’는 자유낙하 10m, 10기압(100m) 방수, 배터리 수명 10년을 뜻하는 트리플 10 시계 개발에 착수한다. 그로부터 2년 뒤 등장한 지-쇼크 5000 모델은 우레탄 소재 케이스로 무브먼트를 전방위 충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한때 일본에서 지-쇼크로 인한 사회문제까지 일어날 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한 적도 있다. 맹목적인 유행의 측면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쿼츠 시계의 방향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전에 없던 트리플 10과 같은 새로운 개념을 쿼츠에 도입해, 쿼츠 시계의 미래를 제시한 것이다. 지-쇼크 등장의 시기는 마침 대량생산으로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쿼츠 시계와 부활의 가능성을 내비친 기계식 시계의 교차점이었다.
오리지널 모델인 5000의 디자인을 계승하는 Ref.5600은 여전히 충성도 높은 지-쇼크의 팬을 거느리고 있다. 기능성 쿼츠로서의 하나의 롤 모델을 수립한 지-쇼크는 일상생활뿐 아니라 항상 위험과 마주하는 직업 군인이 즐겨 애용한다. 군용 스펙을 만들고 그에 따른 시계를 생산하지 않는 우리나라 군이 대표적이다. 특수부대의 요원이나 입대 전 으레 구입하는 시계가 지-쇼크로, 선배 군인이 ‘터프’함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1983
블랑팡 문페이즈 칼리버 6395
험준한 쥐라 산맥의 어느 마을에서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본 장 클로드 비버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되살아날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무브먼트 메이커 프레드릭 피게를 경영하던 자크 피게와 함께 블랑팡을 부활시킨다. SSIH로부터 블랑팡 브랜드의 권리를 인수해 새로운 시계 메이커로 성장시키는데, 그들이 가장 먼저 선보인 모델이 문페이즈 기능을 갖춘 트리플 캘린더였다. 아름다운 문페이즈 시계는 잊혀가던 기계식 시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 모델이 얼마나 판매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블랑팡의 새 역사의 중추 역할을 한 건 맞다. 만약 이것이 실패했다면, 지금의 블랑팡은 물론 기계식 시계 메이커들 또한 존재할지 확신할 수 없을 듯하다.
1985
율리스 나르당 아스트롤라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
1980년대 생산된 기계식 시계에서 손꼽히는 가치가 있는 모델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종의 사명감으로 기계식 시계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 혹은 그 이상의 경외감을 주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아스트롤라비움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그런 의미에서 완성된 시계다. 지금도 드문 천체시계를 손목 위에서 실현한 거의 최초의 모델이며, 설계자는 루드비히 외슬린이다. 다이얼 위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진다. 해가 달을 먹기도 하고 반대로 달이 해를 먹는다. 이렇게 오묘한 천체의 움직임을 쿼츠가 아닌 기계식 무브먼트로 그려낸 것도 놀랄 만하다. 이 천체시계는 1988년 플레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 1992년 텔루리움 요하네스 케플러 등 3부작으로 완성되었으며, 모두 외슬린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사진은 신형 디자인이다).
1988
브라이틀링 이머전시
전자항법 장치로 실용성을 상실한 파일럿 워치가 어떻게 시대에 적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계가 바로 이머전시다. 이머전시는 쿼츠 크로노그래프와 전투기, 항공기 생산을 주력으로 하는 다쏘(Dassault)의 계열사인 다쏘 일렉트로니크에서 개발한 트랜스미터를 탑재했다. 돌돌 감긴 와이어를 캡슐 속에 수납하고 있다가 조난 상황이 되면 이것을 빼내어 안테나로 사용한다. 이머전시는 이를 통해 조난신호를 발신하며, 구조대를 유도한다. 파일럿을 안전한 운항으로 유도한 내비타이머의 뒤를 이어 파일럿의 생명을 지켜내는 새로운 타입의 파일럿 워치라 할 수 있다.
1990's
시계시장의 지각 변동
1980년대 스와치 그룹으로 시작된 그룹화는 리치몬트 등으로 차례로 이어졌다. 기계식 시계는 다시금 새로운 형태로서 시장의 주류로 떠오르게 된다.
SMH는 1992년 브랜드 권리를 매각한 블랑팡을 다시 사들인다. 1998년에는 이름을 지금의 스와치 그룹으로 변경, 1999년에는 브레게를 인베스트코프(Investcorp)로부터 막대한 금액으로 인수한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자케 드로와 글라슈테 오리지널을 그룹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 스와치, 오메가, 브레가 등을 거느리는 스위스의 대표 시계 그룹으로 성장한다. 한편 198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자회사인 램프란트(Rembrandt) 그룹에서 럭셔리 부문을 분리해 탄생한 리치몬트 그룹은 까르띠에를 주축으로 성장한다. 한편 방돔 그룹은 1996년 바쉐론 콘스탄틴, 1997년 파네라이를 흡수하는데, 이듬해 리치몬트는 이 방돔 그룹의 지분을 100% 확보하며 이들 메이커까지 포용하게 된다. 1999년에는 반 클리프 아펠의 지배 지분을 소유하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서도 리치몬트 그룹의 확장은 거셌다. 독일 VDO그룹의 럭셔리 부문인 LHM을 인수하면서 산하의 메이커 랑에 운트 죄네, IWC, 예거 르쿨트르도 합류하게 된다.
1991
블랑팡 르 브라쉬스 1735
블랑팡은 1983년 문페이즈 워치를 시작으로 1987년 미니트 리피터, 가장 얇은 자동 크로노그래프, 1989년에는 최초의 자동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와 8 데이즈 투르비용 등을 차례로 선보였다. 이런 컴플리케이션을 계속 만든 이유는 제품 라인업을 강화하려는 기본적인 목적과 동시에 기계식 시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10년이 넘는 기간, 잊혀진 기계식 시계의 진면목을 알려줘야 했던 것이다. 1991년 발표한 르 브라쉬스 1735의 숫자는 블랑팡의 창립 연도를 의미한다. 이 시계의 큰 의미는 블랑팡이 그간 선보인 컴플리케이션을 하나로 통합함과 동시에, 기계식 시계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데 있다.
한편 샴페인 메이커 모엣 샹동과 코냑 메이커인 헤네시가 1971년 합병된 이후, 1987년 루이 비통까지 함께한 LVMH 그룹은 와인, 패션과 함께 제니스, 태그 호이어 같은 시계 브랜드를 차례로 흡수한다. 다른 시계 그룹과 함께 시계 시장의 지형도를 바꾸어버린 셈. 그룹의 우산 아래에서 안정을 도모하게 된 기계식 시계 메이커들은 쿼츠가 정확성을 추구한 대신 내준 것들, 즉 잃어버린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다. 앞서 언급한 율리스 나르당의 천문시계가 대표적인 예. 기계식 시계로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에 착안한 것이다. 스위스산 손목시계가 럭셔리로서의 성격이 짙어지는 것도 이 무렵이다.
1994
랑에 운트 죄네 랑에 1
동면에서 깨어난 랑에 운트 죄네. 독일 시계가 부활했다. 1994년 이 브랜드는 새로운 랑에 컬렉션으로 랑에 1, 삭소니아, 아케이드 등을 발표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모델은 랑에 1이었다. 지금도 랑에를 대표할 만큼 높은 완성도의 랑에 1은 여전히 개성과 독창성이 넘친다. 데이트 표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두 개의 커다란 창으로 표시되는 빅 데이트와 다이얼 안에 다이얼이라는 구성은 특별하다. 독일 시계다운 개성은 외관뿐 아니라 무브먼트에서 찾을 수 있다. 저먼 실버로 만든 3/4 플레이트는 스위스 시계를 통해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다.
게재호
21호(2012년 07/08월)
글
구교철(타임포럼 편집장)
Editor
크로노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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