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s
깊은 바닷속으로
본격적인 다이버 워치의 시대가 열린다. 현존하는 유수의 다이버 워치는 이때부터 그 모양새를 갖추고, 치열한 격전을 준비한다. 한편 전쟁 후 항공시계 시장은 민간용으로 눈을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된 시점, 전 세계는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전쟁을 통해 빠른 진화를 이룬 항공 분야가 군대에서 민간으로 확대된다. 또 제트 엔진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1952년 제트 엔진 항공기 디 하빌랜드-106 코맷의 운항 개시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지며 본격적 항공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항공기가 주요 운송 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자 파일럿 시계의 배경도 변화한다. 민간이 주도하는 항공 시대를 반영한 시계가 브라이틀링의 내비타이머다. A.O.P.A(Aircraft Owners and Pilots Association)의 마크를 달고 공식 시계로 활약한 내비타이머는 당시 항공 산업의 팽창을 단적으로 의미했다. 한편 바다에서는 전쟁에서 성능을 확인한 다이버 워치가 역시 항공 분야와 마찬가지로 민간에 의해 발전을 이룬다. 스쿠버 다이빙이 대중에게 보급되며, 자연스레 수요가 늘었다. 롤렉스의 오이스터 퍼페추얼에 기반을 둔 서브마리너는 1953년 선보인다. 당시 이 시계는 100m 방수 성능을 갖췄는데, 지금의 다이버워치 ISO 규격에는 미달하는 수치. 하지만 200m 방수 가능한 후속 모델을 재빠르게 발표하며 진화했다. 다이버 워치의 대표 모델로는 서브마리너를 비롯해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스, 오메가 씨마스터, 알람 무브먼트를 탑재한 예거 르쿨트르의 메모복스 딥 씨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잠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회전 베젤을 갖췄고, 메모복스는 알람을 통해 한번 더 시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1952
내비타이머 디자인의 특징이자 기능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복잡한 다이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다이얼 바깥쪽의 복잡한 눈금을 슬라이드 룰이라 부른다. 이 룰은 비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계산할 수 있는 플라이트 컴퓨터 E6B를 시계에 응용한 것이다. 브라이틀링의 창업자 윌리 블라이틀링에 의해 처음 크로노맷에 이식된다. 당시는 크로노맷과 첫 내비타이머인 806 모델 간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로, 두 모델 모두 슬라이드 룰이 장착되었으나 내비타이머가 좀 더 복잡한 형태였다. 슬라이드 룰은 베젤을 돌려 눈금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활용성이 뛰어났다. 가장 단순한 사칙연산부터 속도, 연료의 잔량 등과 같이 비행에 필요한 값을 얻을 수 있다. 이 모델에는 지금은 사라진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메이커인 비너스의 수동 크로노그래프가 탑재되었다.
현재의 내비타이머는 예전 모델과 비교했을 때 외관에서 큰 차이가 없다. 이는 오랜 기간 생산되는 모델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부를 드러냈을 때 이 시계는 완전히 다르다. 인 하우스에서 생산된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01이 탑재되었다. 칼리버 01은 Ref.806이 채택한 비너스 무브먼트와는 분명 다르다. 주말에 시계에서 자유롭거나 혹은 다른 여가용 시계를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응해 늘어난 파워리저브 시간도 그 다른 점 중 하나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도 시계를 발전시키는 요소다.
360도 회전하는 풀 로터 방식의 무브먼트 칼리버 A260을 탑재한 첫 서브마리너 6204 모델에는 다이얼에 방수 표시가 없었다. 하지만 약 100m의 방수성능을 갖췄다. 이듬해 후속 모델이 등장하는데, 이는 약 200m의 방수를 실현했다. 잠수 경과 시간을 표시하기 위해 만든 회전 베젤은 그 당시만 해도 양방향으로 회전했다. 현재는 반시계방향으로만 도는 것이 다이버 워치의 정석이다(시계방향으로 베젤 회전 시, 잠수 가능 시간을 오인할 가능성이 크다). 반시계방향 베젤이 기본 사양이 된 건, 이 시계가 나온 후에도 다소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올해 바젤월드에서 6204 모델과 같이 데이트가 없는 일명 논데이트(non-date) 모델이 발표되면서 서브마리너의 리뉴얼 작업이 완료됐다. 방수 성능과 반시계방향 베젤 요소가 더해지며 완성도가 높아진 이 컬렉션은 세대를 거듭하던 중, 데이트 기능이 있는 가지치기가 일어난다. 데이트 모델과 논데이트 모델로 나뉘게 된 것. 데이트 모델인 Ref.116610LN은 바로 전 모델인 16610 모델과 몇 부분에서 달라졌다. 베젤 인서트를 알루미늄이 아닌 세라믹으로 만들었고, 두꺼운 러그를 사용해 시각적으로 커진 효과를 누렸다. 탄생 60주년을 눈앞에 둔 서브마리너 Ref.11660LN을 보면, 오리지널 모델이 기능이나 디자인 측면에서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프랑스 해군 중령 로베르 말루비는 국방성의 지시로 특수 부대인 전투 잠수부(Les Nageurs de Combat)를 창설한다. 그들의 작전 무대는 당연히 바다가 주였고,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한 필수 장비의 하나로 다이버 워치가 요구되었다. 다이버 워치 장르의 태동기였지만, 특수 부대의 요구를 만족하는 성능의 시계가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피프티 패덤스였다. 서브마리너와 같은 해 등장하며 최고를 다투는 라이벌이 될 수 있었던 피프티 패덤스. 블랑팡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영향으로 이 멋진 컬렉션은 불안정한 생산이 이뤄졌고, 둘의 대결은 한참 뒤로 미뤄지게 된다. 피프티 패덤스는 길이 단위를 의미하는 패덤스(약 1.83m)를 이용한 이름으로 약 90m 방수가 가능했다.
릴리프(relief) 기법으로 만든 베젤이 특징인 1세대 피프티 패덤스는 오리지널 디자인을 복각한 스페셜 에디션의 등장과 함께 단종되었고, 이후에는 지금처럼 오리지널에 기초한 모델이 생산된다. 아우터 회전 베젤을 갖추고 있는 다이버 워치의 전형으로, 오리지널 모델이 당시 다이버 워치 디자인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베젤은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덮여 있는데, 이는 합성수지를 사용한 오리지널 모델에서 기인한다. 베젤에 사용된 야광 물질을 보호하기 위함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다이얼 6시 방향에 방사능 표시가 있는 빈티지 모델은 보통 다이얼보다 더 높은 가치가 책정되는데, 이 모델은 이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피프티 패덤스는 현재의 방수 기술을 바탕으로 당시의 10배에 달하는 1000m 방수를 실현한 파이브 헌드레드 패덤스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시계에는 수동 울트라 슬림 무브먼트의 걸작 칼리버 1003이 탑재됐다. 이 무브먼트의 두께는 고작 1.64mm. 에보슈 공급처는 예거 르쿨트르였다. 같은 에보슈가 오데마 피게에도 공급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하이엔드 메이커가 어떤 장르에 집중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57년에는 피아제가 수동 슬림 무브먼트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2mm의 두께로 이보다 조금은 두꺼웠다. 1960년대에 들어 자동 울트라 슬림 무브먼트를 내세운 재대결이 성사되었다.
1955년 모델을 복각한 제품. 바쉐론 콘스탄틴은 디자인뿐 아니라 당시 발표된 칼리버 1003을 동일하게 탑재하면서 완벽한 리바이벌에 성공한다. 울트라 슬림 워치가 등장한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에 필적하는 얇은 시계가 흔치 않은 사실은 울트라 슬림이 또 다른 의미의 컴플리케이션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많은 기능을 더한 복잡 시계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단순하지만 극도로 얇은 시계를 만드는 일 역시 어렵다.
평범해 보이는 드레스 타입이지만 다른 시계에는 없는 기능이 있었다. 자성은 지금도 기계식 시계를 망가뜨리는 불청객으로, 발전소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의 시계에는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프로페셔널 워치 개념으로 등장한 인제니어는 독일어로 엔지니어를 의미하며 내자성 기능을 갖춘 시계다. 내자성에 대한 해법은 인제이너 같은 특수 시계에서 모색되었으나, 발전된 파일럿 워치가 이미 어느 정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본다. IWC에서 파일럿 워치와 내자성 시계가 모두 개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제니어 Ref.5005의 외관은 빈티지 모델과 사뭇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인제니어의 모델은 1955년이 아닌 1976년 개발된 인제니어 SL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인제니어 SL의 디자인은 얼마 전 타계한 제랄드 젠타에 의해 완성되었고, 현재 인제이너 디자인의 뿌리가 된다. 1989년의 인제니어 Ref.3508은 500,000A/m의 자성에서도 문제 없이 작동하며 내자성 기술에서 분명한 이정표를 세운다. 지금의 이 모델이 재미있는 점은 내자성 시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자성에 대한 해법은 크게 갖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투명한 케이스 뒷면은 내자성 기계식 시계에 대한 수요가 없음을 나타내는 단면이다.
IWC 인제니어와 더불어 내자성 시계로 손꼽히는 밀가우스는 1000가우스(80,000A/m)를 견딜 수 있는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과학자협회의 요청으로 탄생한다. IWC의 마크, 인제니어와 마찬가지로 자성을 차단할 수 있는 보호막(연철로 만든 이너 케이스)을 케이스 속에 넣는 방법을 선택했고, CERN(스위스에 위치한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의 엔지니어를 통해 테스트되어 성능을 입증받았다. 기능 외에 특징적인 부분은 초침이다. 번개가 칠 때의 형상으로 바늘을 디자인했다. 이는 6541 모델과 같은 시기에 출시된 다른 밀가우스 모델인 Ref.1019(평범한 초침 탑재)에서 찾을 수 없는 특징이었다. 따라서 빈티지 시장에서 6541 모델은 좀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된다. 하지만 둘 모두 소량 생산된 까닭에 이들의 평균 가격은 다른 모델을 훨씬 상회한다.
1980년대 단종되었다가 부활한 밀가우스. 내자성 시계는 엔지니어가 일하는 특수한 환경에서의 사용이 목적이다. 하지만 현재는 자성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자 제품에 파묻혀 살고 있다. 이너 케이스를 장착하고 부활한 Ref.116400은 생활 자성에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롤렉스가 개발한 세라크롬 블루 헤어스프링을 통해 전반적인 내자성의 향상을 이뤄냈다. Ref.116400은 6541 모델에서 사용된 번개바늘을 리메이크했다. 블랙과 화이트 다이얼 모델(REF.116640)과 두 가지 색깔의 야광(발광 시에는 초록과 파랑)과 초록색 사파이어 크리스털을 사용한 모델(Ref.116640GV)이 생산된다.
1957년은 구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해로 우주시대가 개막된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만들어진 벤추라는 좌우비대칭의 삼각형 케이스, 독특한 러그 디자인과 전기 무브먼트를 탑재한, 그야말로 ‘미래’를 제시한 시계였다. 해밀턴이 스위스 메이커가 된 것은 이후의 일로 아직 미국의 메이커였던 만큼 미국적 특성이 드러난다. 디자인뿐 아니라 최초의 전기 무브먼트를 통한 합리성은 벤추라를 설명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다. 태엽이 든 배럴의 자리를 배터리로 대체한 전기 무브먼트는 앞으로 등장할 전자식 쿼츠 무브먼트에 대한 예견과 다름없었다.
미국 해밀턴 시대를 상징하는 벤추라. 엘비스 프레슬리가 착용한 흑백 사진으로도 유명세를 탄 시계다. 근래에 들어 벤추라는 영화 <맨인블랙>에 등장한다. PPL로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시대를 암시하는 소품으로도 적절하다. 요즘엔 전기 무브먼트 대신 쿼츠와 기계식 자동 무브먼트를 사용한다. 때문에 오리지널 모델의 다이얼에 삽입된 ‘ELECTRIC’이란 그 당시 미래적인 단어는 지워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자동 무브먼트가 대중화되며 시계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던 때다. 또 오토매틱 와인딩에 대한 접근법 중 다른 하나의 방식이 나타난다. 바로 마이크로 로터의 사용이다. 1955년 유니버설 제네바가 특허를 취득한 칼리버 215는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한 자동 무브먼트였다. 풀 로터 방식에 비해 얇은 두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유니버설 제네바는 이에 대한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다른 메이커가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를 생산할 수 있도록 했고, 풀 로터 방식과 공존을 이루게 된다. 손목시계 시대에 접어든 지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지만 생산량, 기능, 장르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1960년대 기준으로 한 해 600만 개가 넘는 손목시계가 생산되었다). 한편 독일 시계의 거점이었던 글라슈테는 종전 후 동독에 위치한 까닭에, 공산 정권에 의해 국영회사로 통합되었다. 시계 명맥이 끊어진 것이다. 대표 메이커였던 랑에 운트 죄네의 월터 랑에는 고향을 등진 채 서독으로 떠났고, 독일 시계는 기나긴 동면에 들어간다.
1957
게재호
2012년 07/08월(21호)
글
구교철(타임포럼 편집장)
Editor
크로노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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