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리언스 2024 - Part 2

일본 이와테현 모리오카 근처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는 그랜드 세이코 기계식 시계 전문 매뉴팩처다. 2020년 그랜드 세이코 60주년을 맞아 일본 현대 건축의 거장 쿠마 켄고가 새롭게 디자인했다. 그랜드 세이코 철학 '시간의 본질(The Nature of Time)'을 건축이라는 형태로 이뤄낸 곳에서, 시계 장인들이 그랜드 세이코 기계식 칼리버 최고봉 9S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용

그랜드 세이코는 매년 전 세계 매체를 초청해 자사의 시계 제작 설비와 공정을 보여주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랜드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리언스(Grand Seiko Media Experience, 이하 GSME)’라 부르는 투어다. 흔한 기회는 아니다. 일본의 기질적 특성상 평소 보안성이 높고 공개 범위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GSME는 2020년 코비드19가 발발한 이후 잠정 취소됐지만 최근 재개됐다. 지난 9월 9일부터 14일까지 장장 5일 동안 열린 GSME 2024엔 <크로노스 코리아>도 함께 했다.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 투어는 일본 도쿄에서 시작해 중부 내륙의 나가노부터 동북부 이와테까지, 이동 거리만 161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그 중심에는 두 곳의 시설이 있다. 일본 나가노현 시오지리 지역에 위치한 신슈 워치 스튜디오(Shinshu Watch Studio), 이와테현 시즈쿠이시 지역에 위치한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Grand Seiko Studio Shizukuishi).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는 2020년 그랜드 세이코 60주년을 맞아 저명한 건축가 쿠마 켄고의 손길 아래 새롭게 단장을 마쳤다. 이곳에서는 그랜드 세이코 최고급 기계식 시계의 제작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신슈 워치 스튜디오에서는 전반적인 다이얼, 케이싱, 폴리싱 기술과 세이코만이 보유한 하이브리드 메커니즘인 스프링 드라이브(Spring Drive)와 초정밀 쿼츠 생산 시설을 살폈다. 이외 도쿄 긴자를 상징하는 와코 백화점의 세이코 하우스와 세이코 시계탑(1931년), 2020년 긴자에 재설립된 세이코 뮤지엄 등 1881년 긴자에서 설립된 세이코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도 고루 방문했다. 마지막 날 진행된 아키오 나이토 세이코 회장과의 인터뷰는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크로노스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랜드 세이코는 비교적 신생 브랜드로서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오리지널 일본 브랜드로서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서 성공을 거둘 것"이라며 포부를 드러냈다.



2020년 그랜드 세이코 60주년을 맞아 일본 현대 건축의 거장 쿠마 켄고가 새롭게 지은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이와테현(岩手県, Iwate-ken)은 도쿄에서 535km 떨어진 일본 혼슈 동북부에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면적을 자랑하며, 풍요로운 자연 경관과 전통 문화로도 잘 알려졌다. '난부 후지(Nanbu Fuji, 南部富士)'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이와테 산이 특히 유명하다. 이와테 산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시즈쿠이시에선 봄과 여름의 푸른 산, 가을 단풍, 눈 덮인 정상 등  계절마다 변화하는 산의 모습을 고스란히 마주할 수 있다. 바로 이곳에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가 자리한다. 일본어로 ‘타쿠미(匠, Takumi)’라 불리는 최고 수준 장인들이 그랜드 세이코 기계식 시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랜드 세이코 철학 ‘시간의 본질(The Nature of Time)’ 근원지이기도 하다. 






그랜드 세이코가 다이얼에 표현하는 이와테현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 


세이코 제2공장, 다이니 세이코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는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Seiko Watch Corporation)에 속한다. 기존의 세이코 인스트루먼트(Seiko Instrument Inc., SII)가 2020년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으로 통합됐다. 세이코 인스트루먼트의 모태는 1937년 설립된 세이코 제2공장 다이니 세이코샤(第二精工舎, Daini Seikosha)다. 1960~1970년대 다이니 세이코샤와 다이니 세이코샤 스와 플랜트에서 시작된 스와 세이코샤(諏訪精工舎, Suwa Seikosha)는 서로 실력을 겨뤘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성장케하려는 세이코 워치 그룹의 큰그림이었다. 1960년 획기적 정확성을 달성하기 위한 세계 최초의 그랜드 세이코 시계는 스와 세이코샤가 만들었다. 당시 BO(Bureaux Officiels de Contrôle de la Marche des Montres)의 크로노미터 인증도 획득했다. BO는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 기관 COSC(Contrôle Officiel Suisse des Chronomètres)가 출범하기 전 시계 정확성을 측정하던 기관이다. 1967년엔 다이니 세이코샤가 자신들의 첫 번째 그랜드 세이코 시계 44GS를 탄생시켰다. 최초로 ‘그랜드 세이코 스타일’을 따른 시계였다. ‘그랜드 세이코 스타일'이란 그랜드 세이코를 정의하는 디자인 원칙을 뜻한다. 1960년대 중반 세이코 시계 디자이너 타로 타나카(Taro Tanaka)가 정립했다. 그는 시계에서 빛과 그림자의 상호 작용을 중시했다. 평면적 표면, 강하고 선명한 라인, 왜곡 없는 반사를 통해 빛과 그림자의 합을 맞추면 뚜렷한 가독성이 확보된다고 믿었다. 그랜드 세이코 시계를 한번만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케이스와 다이얼은 평평하면서 매끄럽고, 시계의 윤곽선은 분명하고 날카로우며, 시계 표면은 정확하게 빛을 반사하고, 인덱스와 핸즈는 어느 각도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44GS 이후에도 다이니 세이코샤와 스와 세이코샤는 서로 다른 디자인과 기술을 적용한 시계를 생산하며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회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랜드 세이코 브랜드를 발전시켜 나갔다. 다이니 세이코샤는 더 얇고 기술적으로 복잡한 기계식 시계를 선호했고, 스와 세이코샤는 신뢰성 있고 견고한 시계 개발에 몰두했다. 내부 경쟁은 1970년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쿼츠 시계가 시계 시장을 압도할 때에도 계속됐다. 1985년 스와 세이코샤는 세이코 엡슨 코퍼레이션으로, 1987년 다이니 세이코샤는 1987년 세이코 인스트루먼트로 사명을 바꿨다. 이후 세이코 엡슨 코퍼레이션의 신슈 워치 스튜디오는 초정밀 쿼츠와 스프링 드라이브 중심으로 시계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세이코 인스트루먼트는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를 내세워 하이엔드 기계식 시계에 집중해왔다. 스와 세이코샤와 다이니 세이코샤가 만들던 스타일대로 발전한 셈이다. 



1897년 다이니 세이코샤. 


쿠마 켄고가 다시 지은 그랜드 세이코의 집

여느 시계 제조 시설이 그렇듯,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도 처음엔 공장이었다. 평범한 공장은 2020년 그랜드 세이코 창립 60주년을 맞아 일본 대표 현대 건축가 쿠마 켄고(隈研吾, Kuma Kengo)의 손길로 새롭게 태어났다. 총 면적 103,862㎡(약 31,418평), 직원수 700명에 달하는 건물이다. 쿠마 켄고는 주로 일본 전통 건축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선보인다. 재료도 나무, 돌, 흙 등 자연의 것을 활용한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역시 목재 구조로 이뤄졌다. 수평과 수직으로 뻗은 파사드는 일본 종이접기 ‘오리가미(折り紙, origami)’를 연상시킨다. 지붕을 제외한 외벽엔 통유리를 둘렀다. 유리벽은 숲과 하늘을 반사하며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랜드 세이코에게 영감을 주는 사계절의 변화도 가감없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자연과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융합, 쿠마 켄고 건축 핵심은 그랜드 세이코가 추구하는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재미있게도 쿠마 켄고도 개인적으로 그랜드 세이코를 좋아해 시계 몇 점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의 외부 전경.


지속 가능한 건축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는 단순한 시계 제작 공간이 아니다. 주변 자연을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해 체계적인 관리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곳이다. 건물은 자가 발전이 가능하다. 솔라 패널과 ‘3R(reuse, reduce, recycle)’ 시스템을 통해 에너지를 자체 생산하고 소비하며 순환시킨다. 주변 숲의 나무들은 지역 생태계를 유지하고 공장 환경을 보호하는 중요 요소로 관리된다. 직원과 그 가족들이 직접 식생을 꾸리고 ‘와쿠와쿠 숲(WakuWaku Forest)'이라 이름 붙였다. ‘와쿠와쿠'는 설렘이나 기대감을 나타내는 일본어 표현이다. 이 숲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감동을 반영했다. 쿠마 켄고가 특별히 디자인한 ‘인섹트 호텔(Insect Hotels)'도 와쿠와쿠 숲 곳곳에 놓였다. 다양한 곤충들이 서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다. 이런 환경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린 키핑 디파트먼트(Green-keeping Department)’라는 부서가 따로 있다. 전문 정원사와 생태학자들이 협력해 각 나무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건강하게 유지한다. 그랜드 세이코는 정밀 기술을 자연 관리에도 적용했다. 와쿠와쿠 숲에는 나무 900그루가 있는데, 개별 센서를 통해 각각의 성장 상태와 건강 상태를 디지털 시스템으로 실시간 모니터링한다. 나무에 물을 주거나 가지를 다듬는 등의 관리도 자동화했다. 나무들은 항상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는 관광객 유치, 고용 창출 등 지역 공동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역 경제와도 상생하고 있다. 일반 방문객도 그랜드 세이코 웹사이트나 공식 채널 사전 예약을 통해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가이드 투어를 신청할 수 있다. 이번 GSME 투어를 진행한 토모미 이치노쿠라 PR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투어가 점차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음에 따라 방문 가능 일수를 늘렸지만 5~10분 내 전부 매진된다고 한다. 




쿠마 켄고가 스튜디오와 함께 지은 인섹트 호텔.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의 와쿠와쿠 숲 곳곳에 있다. 주변 나무에서 센서를 찾아볼 수 있다.

빛과 자연을 품은 매뉴팩처 
스튜디오 외부의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는 내부에서도 이어진다. 나무와 유리가 완성한 공간은 일본 전통 수제 종이 ‘와시(washi, 和紙)’의 특성이 반영됐다. 와시는 일본 전통의 수제 종이로, 빛을 부드럽게 투과시키면서도 강도가 뛰어나며 자연스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와시의 섬세한 질감은 일본 전통 건축과 예술에서 자주 사용된다. 쿠마 켄고도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내부 조명과 공간 연출을 와시에서 착안했다. 내부 조명은 그 은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재현해 장인들이 시계를 제작하는 환경이 고요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됐다. 천장은 지붕 경사면이 그대로 반영된 박공 타입이다. 일본식으로는 고텐조(kotenzo, 勾配天井)라 한다. 한옥의 서까래와 유사하게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 지붕을 받치는 구조인 고바(koba, 小端)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까래와 지붕의 구조를 통해 시각적 미를 강조하는 전통 일본 건축 요소다. 공간을 더 넓고 높게 느끼게 해주며, 건물의 미적 요소를 강조한다. 벽은 수많은 목재 패널이 수직으로 나열된 형태다. 일본 신사나 사찰에서 벽이나 천장을 마감할 때 쓰던 건축 방식인 ‘야마토-바리(Yamato-bari, 大和張り)의 재해석이다. 나무판을 겹쳐서 붙이기 때문에 외관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도 벽체의 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쿠마 켄고의 말에 따르면, 나무 패널이 규칙적으로 겹쳐진 모습이 그랜드 세이코 기계식 시계의 규칙적인 째각째각 진동 소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 쓰인 목재는 일본잎갈나무(Larch). 산림욕을 하는 듯한 특유의 향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계 제조 시설에서 맡으리라고 상상 못한 향기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내부 전경.

일본 최고 기계식 시계의 비밀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로비가 펼쳐진다. 그랜드 세이코 초기 중요 모델들과 그랜드 세이코 주요 기계식 칼리버 및 핵심 부품 등 역사와 기술력을 가늠할 수 있는 물건들이 도열했다. 그중 인상 깊었던 건 무브먼트 전시 파트였다. 하나의 그랜드 세이코 기계식 칼리버엔 200~300개 이상의 부품이 사용된다. 거의 모든 부품은 사내에서 제조된다. 심지어 부품 제작에 사용되는 드럼 비트 등의 공구도 자체 제작이다. 여성용 기계식 칼리버 9S25 계열도 보였다. 그랜드 세이코에선 여성용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위스 시계 산업에서 많은 브랜드가 여성용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을 중단한 상태다. 여성용 무브먼트는 크기가 작지만 부품 수는 남성용과 거의 비슷해 조립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고도의 기술력을 갖춘 인적 자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랜드 세이코 관계자는 전문 인력 개발 시스템을 설명했다. 일본 내 시계 제작 기술 인증과 국제 시계 기술 경연대회를 기반으로 한 워치 메이커 등급 제도다. 등급은 실버, 브론즈, 그리고 골드로 나뉜다. 브론즈는 일본 최고 수준, 골드는 세계 최고 수준을 뜻한다. 실버와 브론즈 등급은 일본의 공식 인증 시스템을 기반으로 설정됐다. ‘일본 시계 제작 인증(Japan Watchmaking Certification)’이라는 국가 자격 시스템이다. 골드 등급은 국제 경연에서 상위권에 오른 장인에게 부여된다. 국제 경연엔 프랑스에서 열리는 ‘MOF(Meilleur Ouvrier de France)’, 스위스에서 열리는 국제 크로노미터 경연대회(Concours International de Chronométrie)가 있다. MOF는 시계 제작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인증하는 대회, 국제 크로노미터 경연대회는 시계 정확성 및 성능을 테스트하는 대회다. 그랜드 세이코에는 7명의 골드 마스터와 브론즈 스페셜리스트가 있다. 이 타이틀은 영구적이지 않다. 2년마다 골드와 브론즈 등급 재평가가 이뤄진다. 이 사실이 그랜드 세이코 등급을 독보적인 타이틀로 만들었다. 상위 등급 장인도 갈고 닦기를 소홀해하지 않으며, 후학 양성에도 적극적이다. 그랜드 세이코는 고등학교 졸업생을 직접 채용하거나, 자체 교육 시스템을 통해 훈련시킨다. 그렇게 훈련받은 워치 메이커는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랜드 세이코 관계자는 “스위스가 젊은 시계 제작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의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색적 건물은 장인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계식 시계를 제작하고 차세대 장인을 교육하는 데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전통 목조 건축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고급 시계 조립 기준을 충족한다. 모든 무브먼트가 손으로 조립되고 성능 테스트가 진행되는 클린룸(clean room)의 목재 구조도 전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클린룸 전경. 중간의 흰색 테이블이 테스트를 실시하는 곳이다. 현재는 훨씬 더 많은 테스트가 진행되므로 사진 촬영이 금지됐다.


 

클린룸의 타쿠미 워치 메이커들.


클린룸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랜드 세이코는 팀을 나눠 시계를 제조하고 있었다. 시계 조립, 헤어 스프링 조정 및 설치, 그랜드 세이코 인증 과정 등이다. 핵심은 헤어스프링 조정 과정이었다. 헤어스프링은 매우 얇고 가는 금속 스프링으로 밸런스 휠에 탑재된다. 그 두께는 20~30µm(마이크로미터) 정도다. 머리카락보다 가늘다. 헤어스프링은 밸런스 휠이 앞뒤로 회전할 때 늘어나고 줄어들면서 태엽에서 발생한 동력이 일정하게 시간 표시 기어열에 전달되도록 돕는다. 시계의 정밀성 및 정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므로, 헤어스프링의 항상성이 매우 중요하다. 헤어스프링은 니켈, 크롬, 코발트 등 합금으로 제작되며, 최근엔 실리콘도 많이 쓰이는 추세다. 제조가 까다롭고 정밀한 가공이 요구되기에, 무브먼트 자체 제작 비율이 높은 시계 브랜드도 헤어스프링은 공급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랜드 세이코는 헤어스프링을 사내에서 직접 제조한다. ‘스프론(Spronc)’이라 불리는 니켈-코발트 합금 역시 2000년대 초반 자체 개발했다. 탄성이 높고 부식에 강하며 온도 저항성과 항자성을 갖췄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총괄 요시히로 쿠보(Yosihiro Kubo)는 “그랜드 세이코는 합금에 대한 경험이 몹시 풍부하다"며, “그 숙련도는 실리콘 같은 실험적 소재에 도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라 언급했다. 클린룸의 타쿠미 스페셜리스트들은 초정밀 측정 장비를 통해 밸런스 휠의 미세한 시간 오차를 발견하면 이를 수작업으로 정밀하게 조정한다. 

이후 그랜드 세이코 인증 과정으로 넘어간다. 다양한 상황에서 시계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퀄리티 컨트롤 제도다. 대부분의 시계 브랜드는 스위스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COSC)를 받는다. 독자적인 인증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파텍 필립이나 롤렉스, 그리고 그랜드 세이코 정도다. COSC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랜드 세이코는 다섯 가지 인증을 운영한다.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Grand Seiko Standard), 그랜드 세이코 스페셜 스탠다드(Grand Seiko Special Standard), V.F.A(Very Fine Adjustment), 그리고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 콘스탄트 포스(Grand Seiko for Constant Force),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 크로노그래프(Grand Seiko Standard for Chronograph)다.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는 가장 기본 인증이다. 일반적인 그랜드 세이코 시계는 모두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를 충족해야 한다. 그랜드 세이코 스페셜 스탠다드는 보다 상위 기준이다.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보다 더 높은 성능과 정밀성이 요구되는 시계에 부여한다. 해당 시계는 추가적인 정밀 조정과 성능 테스트를 거치며 ±4초 이내의 더 높은 정확성이 구현된다. V.F.A(Very Fine Adjustment)는 최상위 기준이다. 시계를 개별적으로 정밀하게 조정해  ±3초 이내의 극도로 높은 정확성을 보장한다. 주로 그랜드 세이코의 프리미엄 기계식 모델이나 특정 한정판 모델 정도가 V.F.A 인증을 받는다. 그랜드 세이코 크로노그래프는 9SC5 크로노그래프 칼리버를 테스트하며,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 콘스탄트 포스는 2022년 탄생한 코도 콘스탄트 포스 투르비용의 정확성을 보증한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에서 설명한 그랜드 세이코 스탠다드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시계를 차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때때로 추운 곳이나 더운 곳에 있기도 한다. 그랜드 세이코 시계는 8°C, 23°C, 38°C의 세 가지 온도 조건 아래 6가지 위치에서 17일 동안 정확성 테스트를 거친다. 6가지 위치는 시계의 3시 방향, 6시 방향, 9시 방향, 12시 방향이 위를 향할 때, 다이얼 면이 위를 향할 때와 아래를 향할 때다. COSC는 5가지 위치에서만 테스트한다. 그랜드 세이코는 하나를 더 추가했다. 12시 방향이 위를 향하는 자세다. 일본에서는 손목 시계 스트랩을 나란히 모아 탁상시계처럼 세워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부 소비자부터 꼼꼼히 만족시키는 완벽성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그랜드 세이코 인증이 보증하는 시계의 하루 오차 범위는 +5초에서 -3초 사이다. 시계가 하루 최대 5초 빠르거나 최대 3초 느릴 수 있다는 뜻이다. 오차 범위는 시계가 일상적인 환경에서 정확한 시간을 유지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기계식 시계의 특성상 정확도를 완벽하게 달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일정한 오차 범위 내에서 정확성을 측정한다. 시계가 늦게 가는 것보다 빨리 가는 게 낫기 때문에 + 오차의 허용 범위가 - 오차보다 크다. COSC의 오차 범위는 -4초에서 +6초 사이다. 그랜드 세이코 인증이 훨씬 더 엄격하다. 

그랜드 세이코 시계는 전체 성능과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추가 테스트도 수행한다. 무브먼트는 케이스에 조립되기 전 테스트되고, 그랜드 세이코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만 통과한다. 케이싱 후에도 정확도를 확인한다. 이 때는 동작의 정확성 뿐 아니라 방수 기능 등 다른 검사도 실시한다. 특히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면 전체 시계를 검사해 사양을 확인하는데, 이는 기계식 시계는 물론 스프링 드라이브 및 쿼츠 시계도 마찬가지다.







무브먼트를 세공하고 조립하는 타쿠미 워치 메이커들과 그들의 도구.



톱니바퀴(휠)이나 기어가 매끄럽게 회전할 수 있도록 돕는 부품인 피봇까지 폴리싱한다. 마찰을 감소시켜 정확성과 내구성을 높이고 에너지 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다.


품질 검수중.

9SA4 심층 탐구 시간 

9SA4 칼리버.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투어의 마지막 단계는 9SA4 칼리버 심층 탐구였다. 9SA4 개발에 참여한 무브먼트 디자이너 유야 타나카(Yuya Tanaka)와 워치 메이커 유타 오노(Yuta Ono)가 직접 프레젠테이션과 조립 시연을 진행했다. 9S는 그랜드 세이코의 최상위 등급 기계식 칼리버, 9SA4는 그랜드 세이코가 지난 4월 ‘워치스 앤 원더스 2024’에서 에볼루션 9 SLGW003 시계로 발표한 최신 하이비트(고진동) 핸드와인딩 무브먼트다. 2020년 등장한 하이비트 셀프와인딩 칼리버 9SA5을 기반으로 삼으면서 40% 이상 재설계했다. 무브먼트 디자이너 유야 타나카는 9SA5를 만든 후 9SA4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두 칼리버의 개발을 동시에 시작했다고 말했다. 애초에 셀프와인딩과 핸드와인딩 두 버전을 모두 만들기로 계획됐었다고. 
하이비트란, 밸런스 휠의 진동수 36,000vph(10Hz)를 뜻한다. 밸런스 휠이 1초에 10번 진동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인 무브먼트 진동수는 28,800vph(4Hz)다. 진동수가 높을수록 외부 충격 등에 의한 오차가 발생할 확률이 적다. 시간을 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진동수가 높으면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고, 마찰도 더 발생해 부품이 빠르게 마모된다. 그랜드 세이코는 태엽통을 두 개 탑재하는 트윈 배럴 시스템과 듀얼 임펄스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Dual Impulse Escapement System)으로 하이비트의 단점을 보완했다. 일반적인 스위스 레버 이스케이프먼트에서는 메인 스프링의 에너지를 이스케이프 휠(escape wheel)이 받아 앵커(anchor, 팔렛 포크)로 전달하고, 임펄스 주얼(impulse jewel)을 통해 밸런스 휠에 간접적으로 전한다. 에너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면 효율은 낮지만 시간의 정확성을 정밀하게 제어하고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랜드 세이코의 듀얼 임펄스 이스케이프먼트는 에너지 전달 방식을 직접식과 간접식 모두 사용한다. 에너지 효율과 정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 시계는 정밀성, 내구성, 그리고 파워 리저브가 크게 향상된다. 대신 듀얼 임펄스 이스케이프먼트는 전통적인 이스케이프먼트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며, 고도로 정밀한 기술이 요구된다. 그랜드 세이코는 독자적인 MEMS(Micro-Electro-Mechanical Systems) 기술로 듀얼 임펄스 이스케이프먼트 핵심 부품을 제작한다. MEMS는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미세 가공 기술인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 광학 리소그래피)의 일종이다. 감광액과 현상액을 사용해 빛을 받은 부분과 그렇지 않는 부분을 구분해 부품 모양을 찍어 원하는 두께만큼 쌓아올린다. 사진 인쇄 기술과 비슷하다. 이스케이프 휠이나 앵커 등 시계 핵심 부품을 더 가볍고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 

MEMS로 만들어낸 듀얼 임펄스 이스케이프먼트 시스템의 이스케이프 휠과 앵커.

그랜드 세이코는 9SA5를 제작하며 프리스프렁 밸런스 휠에 오버코일 헤어스프링을 새롭게 적용했다. 프리스프렁은 전통적인 레귤레이터 대신 밸런스 휠에 부착된 스크루(조절 나사)를 사용해 시계의 진동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충격이나 진동에도 정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버코일 헤어스프링은 플랫 헤어스프링과 달리 코일 끝 부분이 위쪽으로 올라가서 말려 있다. 헤어스프링이 진동할 때 보다 균일한 중심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중력의 영향도 덜 받는다. 그랜드 세이코는 그 곡선의 이상적인 모양을 위해 8만번 이상 시뮬레이션했다고 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미세하게 헤어스프링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헤어스프링의 시작점을 밸런스 휠에 고정시키는 스터드(rotatable stud)를 달았다. 헤어스프링의 길이나 모양을 변형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등시성을 맞출 수 있는 장치다. 그랜드 세이코는 이 장치로 특허를 받았다. 


(왼쪽)오버코일 헤어스프링을 장착한 프리스프렁 밸런스 휠. (오른쪽)플랫 헤어스프링.

9SA4는 56년만에 재등장한 그랜드 세이코 하이비트 핸드와인딩 무브먼트이기도 하다. 1968년 다이니 세이코샤에서 하이비트 핸드와인딩 칼리버 4520을 탑재한 45GS를 선보인 이래 처음이다. 1967년 67GS로 시작을 알린 셀프와인딩 시계가 점차 핸드와인딩을 대체했기 때문.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금 하이비트 핸드와인딩 칼리버가 새롭게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손으로 태엽을 감을 때 느껴지는 기계식 시계 본연의 매력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그랜드 세이코는 전했다. 착용자가 시계를 감을 때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선택된 방법은 래칫 휠 클릭(click), 태엽을 감는 래칫 휠의 역회전을 방지하는 클릭 레버다. 그랜드 세이코는 서로 다른 클릭 구조를 지닌 프로토타입을 여러 개 제작한 후, 가장 탁월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 판단한 슬라이딩 클릭을 최종 선택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프로토타입의 모양은 물론, 그 움직임이 새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 근방에 서식하는 할미새에서 착암해 클릭 모양을 최종 조정했다. 무브먼트 디자이너 유야 타나카는 새로운 클릭 구조가 9SA4 칼리버 설계 과정에서 가장 까다로웠다고 전했다. 클릭의 손맛(촉각), 경쾌한 클릭 소리(청각), 할미새 같은 움직임(시각)은 시계를 자꾸 감고 싶게 만든다. 9SA4 칼리버는 지난 9월 45GS 리크리에이션 버전으로 다시 한번 존재감을 알렸다. 1968년 그랜드 세이코 첫 번째 하이비트 핸드와인딩 시계를 복기하는 모델로 의미가 있다.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를 방문하고보니, 45GS 리크리에이션의 다이얼 6시 방향에 오리지널과 똑같이 재현한 다이니 세이코샤 로고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9SA4를 탑재한 45GS 리크리에이션. 


다이얼 6시 방향의 번개 모양이 다이니 세이코샤 로고다.

‘시간의 본질’이란
그랜드 세이코의 철학은 ‘시간의 본질(The Nature of Time)’이다. 이번 GSME를 경험하기 전에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느껴졌다. 신슈 워치 스튜디오와 그랜드 세이코 시즈쿠이시 스튜디오를 둘러본 후엔 명확해졌다.‘시간의 본질’은 정확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것, 전통과 현대를 조화하는 것, 그리고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시계 디자인과 기술에 반영하는 것이다. 가격을 상회하는 완성도와 정밀성, 일본 전통 미학의 강조, 단기간에 쌓아올린 기술력 등 그간 그랜드 세이코 시계에 가졌던 긍정적 의문이 모두 풀렸다. 비결은 그랜드 세이코가 중시하는 인간적 가치에 있었다. 기계가 생산한 무브먼트를 마무리할 때도, 테스트를 진행할 때도, 품질을 점검할 때도, 모든 중요 단계엔 사람이, 그리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었다. 그랜드 세이코가 강조하는 ‘타쿠미(장인 정신)’이다. ‘젊음 품귀’ 세상에서도 그랜드 세이코 타쿠미는 계속 이어져나간다. 그랜드 세이코의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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