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삼성이 위기라 한다. 지난 10월 8일, 삼성전자는 이례적으로 실적 부진과 AI 칩 개발 지연에 대한 사과문을 발표했다. 삼성 주가는 올해 초부터 30% 가까이 하락한 상태다. 반도체 수율 관리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다. 삼성 몰락의 원인으로는 재무 관점에서만 판단한 극단적인 단기성 비용 절감이 꼽힌다. 기술 투자에 인색하니 인재가 떠나고 경쟁력은 약화된다. 현재 추락하는 인텔과 유사하다. 기술을 경시한 대가다.
삼성전자, 지난 3분기 실적 사과문 일부. 출처 삼성전자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이미 40년 전 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 회장은 삼성 부회장을 맡았던 1983년 삼성시계를 설립했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뒤 1975년 쿼츠 손목시계용 칩을 개발하는 등 전부터 관련 사업을 진행해왔다. 삼성시계가 출시한 돌체는 우리나라 9시 뉴스 시보를 맡기도 했다. 이후 삼성시계는 스와치그룹 산하의 시계 브랜드 론진과 기술 제휴를 맺고 삼성-론진 시계를 출시하며 사업을 적극 확장했다. 삼성이 시계 사업에서 손을 뗀 건 1998년, 외환 위기 영향이었다. 한국에서 30년 넘게 시계 관련 부품 및 장비를 제조⋅공급한 홍성시계부품 최진기 이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삼성 창원 공장의 시계 제조 기반 시설은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 회장에겐 스위스 무브먼트 제조사 인수 계획도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스위스 정부의 반대로 인수는 무산됐습니다. 대신 삼성은 독일 카메라 브랜드 롤라이를 인수해 그 기반으로 유럽 전역에 삼성시계를 판매할 계획이었습니다.” 외환위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국도 삼성이란 이름 아래 거대 매뉴팩처를 지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출처 삼성
삼성시계 돌체 시보.
1987년 삼성시계 돌체 TV 광고. 출처 EMNcompany
지난 9월, 그랜드 세이코 미디어 익스피리언스에서 만난 아키오 나이토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 회장은 이 회장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83년 삼성과 기술 제휴를 맺으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그 당시 세이코 시계의 초정밀 기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기계식 시계를 애호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비록 협업은 무산됐지만 그의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결렬의 이유를 캐묻자 그는 퀄리티 컨트롤을 언급했다. 삼성의 퀄리티 컨트롤이 세이코가 요구하는 수준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 세이코가 퀄리티 컨트롤을 문제로 삼았던 것도 이해는 간다. 그랜드 세이코의 마감은 현존하는 시계 브랜드 중 극강의 수준이라 알려졌다. 그랜드 세이코 시계는 현미경으로 확대해도 흠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합작이라고 해도 세이코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삼성시계의 품질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 회장 아키오 나이토.
삼성의 입장은 다르다. 1993년 10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보좌한 비서실장이자 당시 삼성시계 사장을 지낸 현명관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2022, 랭귀지북스)에 따르면 세이코가 기술을 제대로 이전해주지 않으면서 불공정 거래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삼성과 세이코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기술에 대한 고집이다. 세이코는 기술력을 컨트롤할 수 있겠냐는 의문, 삼성은 기술력에 대한 갈망이라는 견해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두 기업 모두 기술력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세이코 창립자 핫토리 킨타로.
세이코의 역사는 1881년 도쿄 긴자에 문연 핫토리 시계점에서 시작됐다. 시계점 주인 핫토리 킨타로가 훗날 ‘동양의 시계왕’이라 불린 세이코 창립자다. 그는 일찍이 ‘시계 국산화’를 꿈꿨다. 시계점이 성공 가도에 오르자 곧바로 1892년 시계를 제작할 수 있는 공장인 세이코샤를 지었다. 시계 국산화를 이루기 위해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기술이었다. 해외에서 값비싼 장비를 들여오는 등 설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세이코샤가 ‘메이드 인 재팬’ 시계로 가시적인 성과를 연이을 때에도 핫토리 킨타로는 해외 기술 동향을 계속 주시하며 설비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기반은 세이코가 전 세계 몇 없는 수직통합형 시계 매뉴팩처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반도체 기술을 응용한 MEMS(Micro-Electro-Mechanical Systems), 헤어스프링 합금 등 시계 제작 분야의 독자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계속된 기술 개발은 세이코 홀딩스 그룹(Seiko Holdings Corporation)라는 거대 기업의 원동력이 됐다.
현재 세이코 홀딩스 그룹은 시계를 담당하는 세이코 워치 코퍼레이션, 와코 백화점을 소유한 리테일 회사 와코, 정밀 기계 부품 전문 회사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Inc., 반도체 및 전자 부품 제조에 집중하는 세이코 NPC 코퍼레이션, 네트워크 솔루션 회사 세이코 솔루션 Inc., 스포츠 경기 같은 대형 이벤트의 타이밍 시스템을 운영하는 세이코 타임 크리에이션 Inc. 등 7개 자회사를 운영한다. 세이코 홀딩스는 최근 몇 년 동안 점진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금융 정보 플랫폼 인베스팅닷컴(investing.com)에 따르면 지난 6월 30일 기준 세이코 홀딩스 총 매출은 약 740억 4000만엔(약 6조 6900억 원)이었다. 지난 8월 발표된 2024년 1분기 매출 예측치는 2023년 대비 2% 증가한 약 3060억엔(약 2조 7700억원), 영업 이익은 180억엔(약 1638억원)으로 전망된다. 지난 5월 발표보다 상향 조정됐다. 사업 부문 중 시계 사업(EVS)의 약진이 특히 두드러졌다. 고급 브랜드인 그랜드 세이코나 실용 스포츠 워치 브랜드 세이코 Prospex가 일본과 미국, 유럽 등에서 성과를 올렸다. 다만 디바이스 솔루션(DS) 부문은 중국 경기 둔화와 전자 부품 시장 재고 조정 영향으로 실적이 다소 감소했다. 전망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이다. 세이코 홀딩스는 IoT 관련 사업과 디지털 인프라 서비스를 계속 확장 중이며,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적극 추구하고 있다.
세이코 홀딩스 그룹에서 제공하는 재무 성과(Financial Highlights). 출처 seiko.co.jp
지금의 삼성은 어떤가. 삼성도 반도체 등 시계 외 다른 분야를 개발했지만 현재는 제자리 걸음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경쟁사에 자리를 내주며 퇴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계 사업은 과거의 에피소드로만 남을 공산이 크다. 세이코 홀딩스 회장이 이야기하는 기술에 대한 이 회장의 집착을 되새겨볼 때다.
Editor
유현선
© Sigongsa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All rights reserved. © by Ebner Media Group GmbH & Co. KG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