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수공예술

표현력이 풍부한 수공예 시계의 세계. 그 디자인과 모티프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보인다.

내용

수공예 시계는 시계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하나의 틈새 시장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리그, 다른 시간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년간 상승세를 탄 것도 이 때문이다.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전통적인 예술 기법을 사용해 정교하게 손으로 제작된 시계들은 매혹적이다. 이런 시계들은 스위스 시계 제조 용어로 ‘메티에 다르’라고 불린다. 조각가, 에나멜 아티스트, 보석 세공사, 기요셰 공예가, 미니어처 페인터 같은 예술가들이 메티에 다르를 대표하는 기술자들이다. 다이얼의 작은 표면에 정교한 작업을 수행하는 장인은 종종 마법사처럼 보인다.

이 장인들의 일상적인 활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일’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도가니, 가루, 족제비 털 한 가닥으로 만든 붓 같은 옛 도구들이 놓인 그들의 작업실은 장인과 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신화적인 과거를 연상시킨다. 

며칠 동안의 작업 끝에 조용한 작업장에서 작품들이 탄생한다. 에나멜 다이얼은 색을 한 번 칠할 때마다 다시 구워야 하며, 구울 때마다 깨질 수 있다. 또 다른 작품은 전통적인 기요셰 기계에서 끝 없는 인내로 가공됐다. 그 결과물들은 환상적인 세계에서 온 것 같다. 

 

Patek Philippe 월드타임 미니트 리피터 Ref. 5531G, 화이트 골드, 64만850유로(약 9억6500만원).


다이얼에 담긴 스위스

파텍 필립의 월드 타임 미니트 리피터 Ref. 5531G에는 고급 시계 제작과 고도의 장인 정신이 결합됐다. 다이얼에선 해질녘을 배경으로 스위스 국기를 단 증기선이 제네바 호수를 가로지른다. 이 배는 여행이 지금보다 느리지만 훨씬 더 낭만적이었던 벨 에포크 시대의 모델이다. 그 때의 시계마저 느리게 갔던 건 아니지만, 삶의 감각은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기계식 시계에 가까웠다. 항상 정확한 시간을 알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스위스는 오랫동안 호숫가의 고급 휴양지로 알려졌다. 

이런 인식을 고려하면 어디서나 현지 시간을 알려주는 월드 타임과 결합한 파텍 필립 미니트 리피터는 스위스 시계의 이상적인 상징으로 보인다. 증기선과 호수의 풍경을 담은 ‘클루아조네(Cloisonné)’ 에나멜 기법은 금실로 컬러 필드를 구분한다. 제네바 지역에 깊은 뿌리를 둔 기술이다. 

 

 
Chanel 마드모아젤 프리베 피케 귀 트위드 모티프 워치, 다이아몬드와 옐로 골드, 20개 한정, 45만 유로(약 6억 7700만원).



패션 천재의 핀 쿠션

샤넬 컬렉션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메티에 다르 시계는 샤넬 마드모아젤 프리베 피케 귀 워치다. 코코 샤넬은 벨 에포크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 시대의 화려한 우아함을 정리하고 여성이 직장 생활, 스포츠, 자유로운 움직임을 누리며 합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의상을 디자인했다. 다섯 가지 모델로 구성된 마드모아젤 프리베 피케 귀 워치는 이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기리기 위해 탄생했다. ‘피케 귀(Pique-Aiguilles)’는 재봉사가 손목에 차는 핀 쿠션을 가리킨다. 샤넬 워치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총괄 디렉터 아르노 샤스탱은 핀 쿠션의 커다랗고 볼록한 형태와 샤넬 의상 제작에 사용되는 정교한 기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샤넬 마드모아젤 프리베 피케 귀 트위드 모티프 워치는 압도적이다.

다이얼에는 샤넬 트위드 재킷의 질감이 래커 페인팅으로 실감나게 표현됐다. 재킷과 주머니의 테두리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됐고 단추는 작은 진주로 만들어졌다. 골드 핸즈는 뾰족한 바늘처럼 보인다. 골무, 가위, 줄자 같은  작은 봉재 도구들은 지름 55mm 시계에 담긴 한 장면에 최대치의 매력을 더한다. 시계 제작에 사용되는 수공예 기술은 코코 샤넬 그리고 우아함, 새로운 시작, 대담함, 화려한 인물로 정의할 수 있는 그녀의 오뜨 꾸뛰르와 함께 파리 패션의 신화적인 장을 기념하고 있다.



  
Van Cleef & Arpels 레이디 페어리 로즈 골드 워치, 11만9000유로(약 1억 7900만원).


마법 같은 시간 

반클리프 아펠의 레이디 페어리 로즈 골드(Lady Féerie Or Rose) 워치는 시간을 단순하게 표시하지 않는다. 초, 분, 시간의 익숙한 흐름을 약간 마법처럼 보이게 만든다. 반클리프 아펠은 이를 동화 속 요정의 도움을 받아 독특하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실현했다. 레이디 페어리 로즈 골드 워치에서는 요정이 자개로 된 구름 위에 앉아 마법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다. 이 지팡이가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분을 표시하며, 시간은 구름 부분의 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클리프 아펠과 장인들은 지름이 33mm에 불과한 시계의 다이얼에 다양한 요소들을 담아냈다. 

하늘의 미묘한 색 변화가 흰색과 노란색에서 자주색으로 이어지며 조각된 자개 다이얼의 바탕을 비추고 있다. 요정의 날개는 투명한 ‘플리크아주르(Plique-à-jour)’ 에나멜과 불투명 에나멜을 조합해 섬세하게 표현됐다. 요정의 몸체는 금으로 된 부조로 섬세하게 만들어졌고, 드레스는 다이아몬드와 핑크 사파이어로 장식됐다. 이 화려한 다이얼 아래에는 반클리프 아펠을 위해 독점적으로 개발된 무브먼트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시계의 작은 동화 속 장면은 마법의 손길이 닿은 것이 분명하다. 메티에 다르 시계의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무한한 섬세함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냉정한 관찰자조차 말문이 막힐 정도다.


 

Vacheron Constantin 레 캐비노티에 오마주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앙기아리 전투 속 깃발을 위한 투쟁', 로즈 골드, 경매를 위한 유니크 피스.


위기에 처한 예술

오랜 세월 동안 시계 장식에 사용된 독점적인 수공예 기술들은 점점 희귀해졌다. 시계 제작의 고장인 스위스의 사정은 더 좋지 않다. '노하우' 대신 '사부아페르(Savoir-faire)'라 불리는 스위스 수공예 기술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에나멜 아트, 조각, 미니어처 페인팅 같은 기술을 완벽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수는 적다. 몇몇 장인들이 자신의 작업장에서 이러한 기술과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지만, 수공예 시계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고 수작업이 아무리 정교해도 각각의 작품은 조금씩 다르다. 이 같은 특징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럭셔리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에도 수공예 시계를 소유하는 것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수공예 기술의 현재 상황은 여러 시계 브랜드들이 희귀한 기술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이끌었다.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예거 르쿨트르,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등은 매년 놀라운 메티에 다르 시계를 출시하며,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수공예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손목을 위한 예술 작품

바쉐론 콘스탄틴은 ‘손목 위의 걸작(A Masterpiece on Your Wrist)’이라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 이 제네바의 시계 제조사는 몇 년 전부터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협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박물관 소장 예술품에 기반한 몇몇 메티에 다르 시계가 탄생했다. ‘손목 위의 걸작’ 프로젝트는 이제 독특한 작품의 창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고객들이 선택한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 작품을 모티프로 삼아 캐비노티에 컬렉션의 시계 다이얼을 에나멜로 장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첫 번째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을 위한 자선 경매용으로 제작된 오마주 페테르 폴 루벤스(피터 폴 루벤스에 대한 헌사) 모델이다. 이 시계는 루벤스의 작품 중 ‘앙기아리 전투 속 깃발을 위한 투쟁'을 에나멜 다이얼에 그려넣은 모델로, 바쉐론 콘스탄틴의 에나멜 장인이 원본 그림의 복잡한 음영을 ‘그리자이유(Grisaille)’ 에나멜 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 과정에는 색조 변화를 가장 미세하게 구현할 수 있도록 리모주(Limoges) 도자기에서 유래한 ‘블랑 드 리모주(Blanc de Limoges)’라는 백색 유약이 사용된다.

이렇게 섬세한 작업에는 뛰어난 그림 실력과 더불어, 다이얼 완성까지 약 20회에 걸친 소성 과정을 성공시킬 수 있는 고도의 재료 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최종적으로 시계에 담긴 전투 장면은 지름이 40mm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놀라운 강렬함과 역동성을 자아내는 동시에 루벤스 원작의 역사적 분위기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Hermès 아쏘 리브레 페가수스, 화이트 골드, 24개 한정, 8만1000유로(약 1억 2100만원).


축소된 신화적 존재

에르메스의 기원은 안장 제작에서 시작됐지만, 이 프랑스 브랜드는 항상 예술 공예의 영역에서 활약해왔다. 종종 독창적인 기술을 시계 다이얼에 도입해 화려한 시계를 만들기도 했다. 아쏘 리브레 페가수스 모델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날개 달린 말인 페가수스를 ‘글립틱(Glyptic)’ 조각 기법으로 묘사했다. 페가수스가 다이얼에서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이얼 재료는 독특하게도 색을 입힌 아게이트(Agate, 마노)다. 페가수스의 미묘한 반투명 회백색 음영은 조각의 다양한 깊이가 각기 다른 색상의 마노 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현됐다. 덕분에 41mm 면적에 3차원 예술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 시계는 뛰어난 수공예 기술뿐만 아니라,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신화 속 동물이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로움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Louis Vuitton 땅부르 피어리 하트 오토마타, 로즈 골드, 42만 유로(약 6억원).


로미오와 줄리엣

전설을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수공예 시계의 디자인에서 매우 인기 있는 소재다. 루이 비통의 땅부르 피어리 하트 오토마타는 불멸의 열정을 상징하는 요소들로 장식됐다. 장미, 가시, 불타는 심장, ‘Sweet’이라고 적힌 띠, 그리고 왕관이 루이 비통 로고가 새겨진 다이얼 위에 모여 하나의 모티프 앙상블을 구성한다. 이 디자인은 그림 동화의 한 장면이나 올드스쿨 타투 도안집을 연상시킨다.

다이얼은 다양한 에나멜 기법과 미니어처 페인팅이 결합됐고, 장미와 왕관의 조각적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유명 에나멜 장인 딕 스틴만(Dick Steenman)이 참여했다. 하지만 땅부르 피어리 하트 오토마타는 단순한 정적 모티프를 넘어선 시계다. 루이 비통의 시계 매뉴팩처인 라 파브리끄 뒤 떵(La Fabrique du Temps)에서 개발한 첫 번째 셀프와인딩 무브먼트인 LFT 325 칼리버는 여러 가지 기능을 실현했다. 8시 방향의 푸시 버튼을 누르면 다이얼의 심장이 열리고 ‘Sweet’라는 단어 아래 ‘BUT FIERCE’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이와 함께 장미꽃 가운데 루이 비통의 모노그램 플라워 심벌이 회전하고, 심장에서 불꽃이 일며, 다이얼의 가시가 자라나는 등 생동감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고, 장미에는 가시가 있으며, 정교한 수공예 시계는 다소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런 시계들은 놀라움과 감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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