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파일럿 워치를 일상의 럭셔리로
근대적 파일럿 워치가 등장한 건 1930년대 중반 무렵이다. 1920년대에 탄생한 초창기 파일럿 워치의 대부분은 위치를 계측하기 위한 회전 베젤을 갖춘 아워 앵글 워치였다. 그렇지만 손목시계와 항공기의 진화는 불과 10년 만에 파일럿 워치의 존재 방식을 바꿔놓았다. 우선 1930년대에 시계 업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열거해보자. 강화 유리의 발명(1931년), 잉카블록 내진장치의 발명(1933년), 플라스틱 소재 유리의 발명(1938년). 이 당시에 스크루 다운 방식의 방수 케이스도 보급됐다. 아울러 항공기의 속도와 순항 고도 및 거리가 대폭 향상됐다. 새로운 시대의 파일럿 워치에는 마린 크로노미터와 비슷한 역할이 요구됐다. 정밀함이 중요했던 이유는 바늘과 회전 베젤을 사용해 정확한 위치를 산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항공기가 높은 고도를 고속으로 비행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기능이 필요하게 됐다. 그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방수 능력과 높은 시인성이었다. 이런 조건을 충족한 본격적인 파일럿 워치 가운데 하나가 IWC의 통칭 마크10(1943년)이었다. 방수 성능이 좋은 2피스 구조의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는 스크루 다운 방식의 케이스백을 가졌고, 내충격성을 높이기 위해 밸런스 축의 위 아래로 잉카블록 내진장치를 설치했다. 다이얼은 시인성이 높은 검은색. 아울러 인덱스의 타이포그래피가 간결해져 가독성이 한결 좋아졌다.
어째서 근대적 파일럿 워치가 방수 능력과 시인성을 중시하게 된 걸까. 항공기에 레이더가 생기고, 콕핏(혹은 파일럿 슈트)에 여압이 이뤄지면서 시계 내부의 기압 변화가 일어나 종종 유리나 케이스백이 튀어나간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베젤과 중간 케이스를 일체화한 2피스 구조의 케이스와 스크루 다운 케이스백을 갖춘 마크10의 설계는 당연했다. 유리가 빠지는 문제는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케이스 가공 수준이 낮았던 당시에는 그런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이런 문제는 파일럿 워치에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성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고도를 비행하는 파일럿과 시계는 항상 태양에 노출됐다. 강한 햇빛 아래에서 흰색이나 은색 다이얼은 보기 힘든 데다가 반사된 빛이 적기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높은 고도에서의 비행이 당연해진 1940년대 이후 검은색 다이얼이 파일럿 워치의 표준이 됐다.
파일럿 워치 마크ⅩⅧ
Ref. IW327011
2016년 출시. 전작인 마크17보다 케이스 지름을 1mm 줄였고, 케이스 마감을 개선했다. 미세 조정이 가능한 브레이슬릿도 갖췄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30110, 28,800vph, 21스톤, 42시간 파워리저브, 지름 40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655만원.
파일럿 워치 마크ⅩⅧ
Ref. IW327002
실버 다이얼 버전. 다이얼 광택을 약하게 한 대신 인덱스에 광택을 내 콘트라스트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고급스러움을 주는데도 성공했다. 다이얼과 날짜 디스크의 간격이 좁다. 제원은 검은색 다이얼 모델과 동일하다. 535만원.
파일럿 워치의 디자인을 완성한 마크11
1948년에 발매한 파일럿 워치 마크11은 근대적 파일럿 워치의 완성형이었다. 기본적인 디자인은 마크10을 따랐지만 다이얼 디자인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파일럿의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간을 알아볼 수 있게끔 다이얼 12시 방향에 커다란 ▲마크를 표시했다. 파일럿의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라는건 기내가 급격히 감압된다든가 커다란 중력 가속도가 붙은 상태를 의미한다.
1930년대에는 이런 상황이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항공기의 성능이 급속히 발전하자 파일럿 워치의 디자인은 최대한 시인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크11은 1948년부터 1984년까지 영국 공군용으로 제조됐고, 일부는 시판되기도 했다. IWC의 파일럿 워치가 부활한 건 1988년의 일이다. IWC가 어떤 이유로 파일럿 워치를 부활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당시 같은 LMH그룹에 속해 있던 예거 르쿨트르의 메카 쿼츠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탑재하기 위해서라는 게 유력하다. 이 시계가 성공을 거두자 IWC는 스플릿 세컨드 기능을 갖춘 도펠 크로노그래프(1992년)를 출시했다. 1994년에는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를 탑재한 스리 핸즈 모델인 마크12를 발매한다. 1943년에 출시한 통칭 마크10은 마크 시리즈가 성립된 이후에 명명한 것이다.
마크12는 사실상 IWC 최초의 민간용 파일럿 워치로, 오늘날의 파일럿 워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마크11과 다르게 셀프와인딩 무브먼트에 날짜 기능을 갖췄지만 IWC가 마크11의 후계자라고 밝혔듯이 마크12의 기본적인 디자인과 구성은 마크11을 계승했다. 당시 디자인은 시계 역사가인 라인하르트 마이스가 감수했을 거라 추측한다. 그는 파일럿 워치의 완성형인 마크11의 디자인을 크게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민간용이라고는 해도 IWC의 파일럿 워치는 전문가의 사용을 전제로 만들었다. 1994년 IWC는 스위스 공군의 곡예 비행팀인 ‘파트루이 스위스’에 29개의 마크12를 납품했다.
IWC의 파일럿 워치가 크게 진화한 건 1999년에 출시한 마크15부터다. 가장 큰 변화는 무브먼트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IWC가 파일럿 워치 디자인에 손을 댔다는 점이다.
2002
빅 파일럿 워치
Ref. 5002
2002년에 발표한 빅 파일럿 워치. 매뉴팩처 셀프와인딩 칼리버 5011을 탑재했다. 기본 디자인은 1940년의 독일 공군용 파일럿 워치 ‘B-Uhr’에서 빌려왔다. 지름 46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1940
빅 파일럿 워치
52 T.S.C.
1940년에 1000개만 생산한 빅 파일럿 워치의 원조. 크로노미터급의 정밀함을 위해 회중시계용 무브먼트인 칼리버 52 T.S.C.를 탑재했고, 시인성을 높이기 위해 지름이 49mm나 되는 커다란 다이얼을 사용했다. 지름 55mm, 스테인리스스틸.
2012
빅 파일럿 워치
Ref. IW5009
2012년에 발표한 빅 파일럿 워치에 2006년의 마크16에 가까운 디자인 코드를 부여했다. 다이얼 디자인이 깔끔해졌고, 인덱스도 약간 가늘어졌다. 셀프와인딩, 지름 46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2016년 리뉴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렸던 최초의 스케치. 마크18 특유의 인덱스 폰트와 가늘게 줄여 입체감을 살린 베젤을 볼 수 있다.
케이스 제조법의 개선이 가져온 변화
절삭으로 케이스를 만드는 방법은 현재 많은 브랜드에 보급됐지만 1980년대 초에 절삭으로 케이스를 만들려고 했던 스위스 브랜드는 IWC밖에 없었다. 그 계기가 된 건 포르쉐 디자인의 티타늄 케이스였다. 여러 공급처로부터 제조를 거절당한 IWC는 공작기계를 구해 직접 케이스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티타늄 가공을 통해 케이스 제조 노하우를 축적한 IWC는 곧 스테인리스스틸도 절삭으로 가공했고, 케이스의 질감도 높이려 했다.
IWC가 외장을 통해 활로를 뚫고자 한 건 분명 마크12부터다. 1994년 IWC는 세라믹 케이스를 사용한 ‘세라믹 플리거’를 발표했다. 1997년에는 마크12에 티타늄 케이스를 적용한 한정 모델인 ‘사브’를 출시했다. 케이스는 모두 절삭 방식으로 제조했다. 1999년에 ‘GST’와 동시에 발표한 마크15는 ‘GST’와 마찬가지로 절삭 기술을 응용한 양산형 모델이었다. IWC는 이전에도 절삭한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를 사용하긴 했지만 대대적으로 사용한 건 마크15 이후다. 1999년 IWC는 모든 케이스의 65%를 직접 생산하기에 이르렀다(그중 티타늄은 25%). 당연히 그 65%에는 파일럿 워치 케이스도 포함됐다.
단조에서 절삭으로의 변화는 극적이었다. 케이스의 모서리가 날렵해지면서 파일럿 워치는 고급스러운 실용 모델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더라도 크라운을 돌려보면 마크12에서 마크15 사이에 생긴 변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크12의 케이스도 품질이 괜찮았지만 크라운을 돌려보면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자체 생산한 마크15의 케이스에서는 이런 단점을 보완했다. 모델이 바뀔 때마다 크라운 주변의 만듦새는 점점 좋아졌는데, 필자가 아는 한 현재의 파일럿 워치는 걸림이 거의 없다. 마크18과 비슷한 가격대의 시계에서 볼 수 있는 케이스의 만듦새는 해마다 좋아지고 있지만 IWC가 생산하는 케이스는 완성도가 훨씬 높다. IWC는 마크15와 마크16(2006년)의 초기형에 나사 고정 방식의 정교한 11연 브레이슬릿을 채용했다. 이후에는 이를 발전시켜 손쉽게 링크를 끼거나 뺄 수 있는 7연 브레이슬릿으로 개량했다. 그 정교한 감촉은 당시 브레이슬릿의 기준을 크게 뛰어넘었고, 오늘날의 브레이슬릿과 비교해도 최고 수준이다. IWC는 마크15에서 얻은 방법론을 이후에 출시한 파일럿 워치에도 적용했다. 모델이 바뀔 때마다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의 질감을 개선했고, 본래 전문가용이었던 수수한 파일럿 워치는 강인한 고급 모델로 변모해갔다.
2016
빅 파일럿 워치
Ref. IW500912
마크18과 같은 디자인 코드를 부여한 빅 파일럿 워치의 최신작. 케이스 전면은 헤어 라인 마감을, 베젤의 윗면과 러그의 능선에는 폴리시드 마감을 했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51111, 21,600vph, 42스톤, 7일 파워리저브, 지름 46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1680만원.
또 하나의 ‘파일럿’이 바꾼 인덱스
IWC의 파일럿 워치에는 마크 시리즈 외에도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1940년대 독일 공군용 항공시계에서 유래한 빅 파일럿 워치다. 회중시계용 무브먼트를 탑재했던 거대한 손목시계는 매뉴팩처 칼리버5000의 등장과 함께 부활했다. 2002년에 출시한 빅 파일럿 워치가 1940년에 탄생한 오리지널 모델의 디자인을 담고 있는 이유다.
마크 시리즈와 빅 파일럿 워치의 디자인은 매우 비슷하다. 둘 다 12시 방향에 있는 삼각형 마크와 아라비안 숫자 인덱스 그리고 긴 초침을 가졌다. 그러나 인덱스 디자인과 바늘 모양은 서로 다르다. 동일한 컬렉션에 두 가지 디자인이 있다는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크 시리즈와 빅 파일럿 워치가 인기를 끌면서 IWC의 경영진과 디자이너들은 둘의 차이를 메워 하나의 라인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한 시도가 이뤄진 게 2006년의 마크16이다.
약간 커진 케이스가 주목을 받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리프 핸드나 훨씬 간결한 인덱스 같은 빅 파일럿 워치의 디자인 요소를 마크 시리즈에 담았다는 점이다. 이후 영국과 독일의 디테일을 어떻게 융합시킬지가 파일럿 워치를 디자인하는데 있어 하나의 열쇠가 됐다. 이 과정에서 인덱스를 키우거나 가늘게 하는 등의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이는 1948년의 마크11과 1940년의 빅 파일럿 워치가 얼마나 뛰어난 디자인을 지녔는지를 증명한다. 크리스찬 크눕이 이끄는 IWC의 디자인팀은 최신 마크18에서 마침내 적절한 답을 찾았다. IWC는 2016년 마크18 발표 당시 디자인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오랫동안 IWC가 고심해온 인덱스 서체에 관한 내용이었다. 비교 대상은 마크 시리즈가 아닌 빅 파일럿 워치였다. IWC는 2002년의 빅 파일럿 워치를 인용해 지금까지 어떻게 서체를 세련되게 다듬었는지 설명했다. 이 사례는 디자인 팀이 빅 파일럿 워치 디자인을 마크 시리즈에 접목하려 한 노력을 잘 보여준다. 2002년의 서체는 각이 지고 게르만 민족의 성향이 너무 짙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모서리를 둥글려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자 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모델이 새롭게 바뀔 때마다 인덱스를 쇄신한 경우는 필자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IWC의 파일럿 워치를 제외하면 얼마 되지 않는다. 브랜드로서는 커다란 도박이지만 2006년의 마크16에서 비롯된 시도는 2016년의 마크18에서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IWC의 디자인 팀은 오랜 시간을 투자해 인덱스의 폰트를 개선했다. 마크18 및 파일럿 워치 발표 당시 진행했던 디자인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면 2002년의 빅 파일럿 워치를 시작으로 어떻게 디자인을 개선해왔는지 알 수 있다. 마크16 이후 사라진 숫자 9는 2016년에 부활했다.
코팅의 진화와 다이얼의 개선
IWC는 마크16부터 마크18에 걸쳐 외장의 질감을 더욱 높이기 위해 유리 코팅을 개선하고 프로토타입 제작에 3D 프린터를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노력은 IWC에만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됐건 최근에는 많은 브랜드가 검은색 다이얼을 적극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또렷한 검은색 다이얼을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실용성을 중시해온 IWC는 꽤 이른 시기부터 유리에 무반사 코팅을 했다. 특히 빛의 반사를 없애야 하는 파일럿 워치에 빨리 적용했다. 그렇지만 초기의 코팅은 푸르스름한 느낌이 강했고, 다이얼의 색이나 질감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후 IWC는 코팅의 질감 개선에 전념했고, 지금은 무반사 코팅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이는 다이얼의 질감 개선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코팅이 바뀌고 다이얼을 읽는 게 쉬워진 이후 스위스 브랜드는 검은색 다이얼을 적극 사용하면서 질감을 높였다. 예전부터 검은색 다이얼을 이용한 IWC도 파일럿 워치 모델을 변경할 때마다 세밀하게 뉘앙스를 개선했다.
시제품 제작 단계의 다이얼. 마크16 이후 IWC는 파일럿 워치의 다이얼에 다양한 시도를 했다. 검은색 다이얼의 발색과 표면 처리를 개선한 것도 그중 하나다.
IWC는 파일럿 워치 케이스의 질감과 입체감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개량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건 디자인 부문에 도입한 3D 프린터다. 미세한 수정이 가능해지면서 케이스의 마감과 디자인이 크게 진화했다.
2016년부터 정규 라인업으로 편성된 어린 왕자 에디션. 디지털 방식의 애뉴얼 캘린더 기능이 있고, 글라스백을 적용했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52850, 28,800vph, 36스톤, 7일 파워리저브, 지름 46mm, 레드골드, 60m 방수. 250개 한정. 4250만원.
위 모델의 로터 디자인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어린 왕자’의 삽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문가용 툴 워치에서 탈피한 지금의 파일럿 워치를 상징하는 모티프다. 일반적으로 무브먼트에는 이런 디자인을 적용하지 않지만 무브먼트 개발에 디자인 팀이 참여하는 지금의 IWC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IWC의 파일럿 워치 중에서 마크11과 마크12의 다이얼은 도금 가공한 것이다. 내자성이 있는 연철 다이얼에 래커를 칠하는 게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도금이 잘되도록 다이얼 표면을 거칠게 만들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검은색으로 도금을 하면 색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았고, 다이얼 표면을 거칠게 하는 바람에 강한 빛을 쏘일 경우 백탁 현상이 나타났다.
IWC는 파일럿 워치에 사용하는 검은색 다이얼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도금과 래커 마감을 함께 적용했다(도금 여부는 모델에 따라 다르다). 이로 인해 발색이 개선됐을 뿐만 아니라 강한 빛을 쏘일 때 백탁 현상이 발생하지 않게 됐다. 완성형은 역시 마크18이다. 검은색 다이얼 표면은 적당히 거칠어졌고, 발색은 더욱 선명해졌다. 폴리시드 래커 마감만큼 한눈에 드러나는 고급스러움은 없지만 시인성과 고급스러움을 교묘히 양립시킨 점에서 현재 IWC 파일럿 워치의 다이얼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IWC 파일럿 워치의 다이얼이 고급스럽게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다이얼과 날짜 디스크의 간격 때문이다. 1992년의 도펠 크로노그래프와 1994년의 마크12는 모두 다이얼과 날짜 디스크의 간격을 타사의 고급 모델 수준으로 메웠다. 마크15에서는 간격이 더욱 좁아졌고, 마크18에서는 다이얼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에 날짜 디스크를 놓았다. 다른 브랜드라면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충격을 받을 경우 둘이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파일럿 워치를 만들어온 IWC는 둘의 간격을 해마다 좁혀 최신 파일럿 워치에 훨씬 더 고급스러운 느낌을 담아냈다.
빅 파일럿 워치 어린 왕자 에디션
Ref. IW500916
어린 왕자의 정규 모델. 빅 파일럿 기본 모델과 제원은 같지만 도금한 파란색 다이얼을 적용했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51111, 21,600vph, 42스톤, 7일 파워리저브, 지름 46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1680만원.
파일럿 워치 마크ⅩⅧ 어린 왕자 에디션
Ref. IW327004
파란색 다이얼의 마크18. 색감을 조금 떨어뜨린 건 시인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보기 드문 색감이지만 발색은 더할 나위 없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30110, 28,800vph, 21스톤, 42시간 파워리저브, 지름 40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535만원.
파일럿 워치 크로노그래프 어린 왕자 에디션
Ref. IW377714
크로노그래프 버전의 어린 왕자. ETA7750을 개량한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현재 출시 중인 파일럿 워치의 케이스백에 새긴 각인은 에칭 방식을 사용했지만 깊게 새겼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79320, 28,800vph, 25스톤, 44시간 파워리저브, 지름 43mm, 스테인리스스틸, 60m 방수. 655만원.
3D 프린터로 미묘한 입체감을 얻다
케이스의 입체감이 개선된 원인 중 하나는 3D 프린터다. 리치몬트 그룹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건 필자가 아는 바로는 보메 메르시에다. 그 후 IWC도 곧바로 채용(CEO였던 조지 컨은 보메 메르시에의 회장을 겸임했다)해 개발 시작 단계의 모델링에 활용했다. 3D 프린터의 장점은 디자인이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지 목업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성과는 2016년의 파일럿 워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충분한 검토 끝에 베젤을 미묘하게 줄이고 입체감을 늘린 케이스는 얼핏 보면 개량이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만약 3D 프린터가 없었다면 이 같은 개량은 조금 더 밋밋해지지 않았을까.
다이얼 질감을 개선한 IWC는 파일럿 워치의 베리에이션을 늘릴 수 있었다. 바로 파란색 다이얼을 지닌 파일럿 워치 ‘어린 왕자’ 에디션이다. 예전에 파일럿 워치 한정 모델에 파란색 다이얼을 사용한 적은 있지만 정규 모델로는 처음이다. 그 전까지 정규 모델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IWC가 파일럿 워치에 연철 소재의 다이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철에 검은색 도금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파란색 도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IWC는 다이얼 표면을 강하게 헤어 라인 처리한 뒤 그 위에 은 도금을 해 연철 다이얼에 선명한 발색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덕트 매니저 중 한 사람이 “꽤나 고생했다”고 하는 말도 납득이 간다. 선명한 파란색 다이얼 제조법을 확립한 IWC. 발색의 훌륭함에 대해 말하자면 수많은 브랜드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파일럿 워치에 파란색 다이얼을 정규화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마크15 이후 케이스 품질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IWC가 마침내 마크18에 새로운 다이얼까지 추가한 셈이다. 중요한 사실은 파일럿 워치로서의 기능성을 전혀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IWC는 시계를 전시하는 데 사용하는 거치대와 집기의 디자인까지 새롭게 했다. (위)파일럿 워치를 장식하는 거치대의 아이디어 스케치. 항공기 날개나 격납고 등을 모티프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집기 스케치. 디자인을 통해 컬렉션에 스토리를 부여하고자 했다.
새로운 콘셉트로 꾸민 IWC 부티크의 예. 왼쪽은 빅 파일럿 제작의 모티프가 된 융커스52, 오른쪽은 마크18을 상징하는 스핏파이어의 프로펠러다.
고급스러워졌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IWC의 CEO였던 조지 컨은 “시계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브랜드, 두 번째가 디자인 그리고 세 번째가 무브먼트”라고 했다. 디자인을 중시하는 그의 자세는 디자이너 크리스찬 크눕을 영입한 후 더욱 견고해졌다. IWC 디자인 부서는 제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카탈로그나 집기, 부티크 디자인에도 관여한다. 보통 이런 일은 외부에 위탁하곤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통일감과 스토리를 중시하는 IWC는 사소한 것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브랜드 관련 영상까지 직접 제작하는 곳은 스위스 시계 브랜드 중에서도 흔치 않다.
디자인 부서를 총괄하는 크리스찬 크눕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브랜드가 대행사를 이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IWC는 디자이너와 영상 제작자를 직접 고용합니다. IWC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려 합니다. IWC가 어떤 브랜드인지 또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과 작업할 수 있고, 결과물을 직접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원들끼리 일을 하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도 쉽고, 시간도 단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리치몬트 그룹은 각 브랜드의 디자인 부서를 강화하고 있지만 IWC처럼 자주적인 브랜드는 찾기 어렵다. 자연스럽게 IWC의 기업 이미지도 크게 바뀌었다. 시계의 질감이 향상되고, 디자인이 세련되게 바뀌고, 부티크가 달라져도 파일럿 워치의 본질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베젤과 중간 케이스를 일체화한 2피스 구조의 케이스를 예로 들어보자. 급격한 감압을 고려해 채용한 이 케이스 구조는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제조 비용을 감안하면 3피스로 나누는 게 효율은 좋다. 하지만 IWC는 고집스럽게 예전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무브먼트를 연철 내부 케이스로 감싸는 설계도 일부 모델을 제외하면 여전히 남아 있다. 모든 프로토타입을 대상으로 –20~70℃의 온도에서 진행하는 엄격한 검사 역시 IWC의 시계라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 파일럿 워치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가 보고 들은 바로는 IWC 파일럿 워치는 외장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훨씬 진화했다. 전문가용 툴 워치에서 탈피해 실용적인 럭셔리 워치로 진화한 파일럿 워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프로버스 스카푸시아(샤프하우젠의 신뢰)라는 IWC의 철학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Originally appeared in Chronos Japan
게재호
53호(2017년 11/12월)
글
히로타 마사유키(Masayuki Hirota,
Editor
이재섭
사진
요시에 마사노리(Masanori Yos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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