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TOS de CARTIER GALBÉE
스크루 모티브를 계승한 산토스의 기본형
산토스 드 까르띠에 갈베 XL
산토스의 기본 모델. 1978년 모델의 디자인을 물려받았지만, 시계 전체의 질감이 훨씬 향상했다. 착용감 또한 우수하다. 셀프와인딩 Cal.049MC, 21스톤. 28,800vph, 약 42시간 파워리저브, 스테인리스스틸, 45.54× 34.87mm, 30m 방수, 760만원.
1904년에 등장했다는 까르띠에의 산토스는 기존의 브레이슬릿 장착 시계라는 틀을 넘어선 최초의 양산형 남성 손목시계였다. 훗날 까르띠에 탱크도 산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델은 손목시계의 진화와 더불어 시간이 갈수록 잊혀졌다. 그 첫 번째 원인은 1917년에 등장한 탱크의 인지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에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각형 케이스에 방수성을 부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까르띠에는 1970년대 후반에 방수성을 위해 산토스를 라운드 케이스로 만들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결국 고무 개스킷이 진화하며 산토스라는 걸작이 다시금 무대 위로 등장한다.
1978년의 새로운 산토스는 골드와 스테인리스스틸을 대담하게 조합해 오리지널의 조형을 유지하면서 방수성과 실용성을 담은 근대적인 시계로 탄생했다. 사진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갈베는 그 최신판에 해당한다. 커다란 차이는 디자인에 있다. 첫 모델의 디자인과 특유의 스크루 모티브를 살리면서도 대담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외모와 크기로 완성했다. 그래도 요새 기준으로 보면 더없이 얌전해 보인다. 케이스 전체를 활처럼 굽혀 착용감을 개선한 점도 지금의 까르띠에다운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까르띠에가 자체 제작한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은 과거 모델에서는 꿈꾸기조차 힘든 치밀함을 최신판 산토스에 성공적으로 부여했다. 산토스의 뛰어난 디자인은 탄생 10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러그와 일체형인 케이스와 간결하고 시인성이 뛰어난 다이얼 등을 보면 까르띠에의 디자인 센스가 너무나도 시대를 앞서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손목시계의 선조이자 영원한 간판 모델인 산토스. 다음 장에서는 이 시계가 탄생한 경위를 되돌아보기로 한다.
지금의 산토스를 대표하는 스크루 고정 베젤. 미들케이스를 스크루로 고정한 덕분에 30m의 방수 성능을 얻었다.
1904년 모델로부터 물려받은 다이얼. 무광으로 마감하고 인덱스를 굵게 처리한 것 외에는 오리지널과 거의 같다. 단지 시곗바늘만은 예전의 애플 핸드에서 현재 까르띠에가 즐겨 사용하는 검 모양으로 바뀌었다. 또한 모두 제대로 블루잉 가공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다.
케이스 옆면. 딱히 갸름한 맵시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두께는 8.67mm에 불과하다. 아울러 케이스 전체를 둥그스름하게 굴렸기 때문에 착용감은 매우 우수하다. 브레이슬릿의 두께와 무게도 비율적으로 적절하다. 산토스가 탄생 이래 100년 이상 최전선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손목과의 친화력이 뛰어나서다.
1978년 이후의 산토스에 추가한 크라운 가드. 프리베 까르띠에 파리 컬렉션(Collection Privee Cartier Paris)에 포함된 산토스 이외에는 기본적으로 이 가드가 달려 있다. 하지만 마감은 과거 모델과 전혀 다르다. 직각으로 잘라낸 부분의 처리나 헤어라인의 공들인 마감 등에서 현재 케이스를 자체 제작하는 까르띠에만의 미적 감각이 느껴진다.
케이스 옆면과 이어지는 러그. 브레이슬릿을 고정하는 핀은 의외의 위치에 있지만, 이 또한 산토스의 전통이다.
손목시계의 탄생
아르데코를 선도한 까르띠에 최초의 남성용 손목시계
산토스의 프로토타입은 1904년에 나왔다. 곧잘 아르데코라고 간주하는 그 디자인은 사실 아르데코의 유행보다 2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까르띠에는 이렇게 앞선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개발자인 루이 까르띠에를 중심으로 산토스의 등장과 함께 손목시계 산업에 진출한 까르띠에의 역사를 풀어보고자 한다.
산토스 손목시계 [1915]
1915년의 산토스. 기존 까르띠에 공장에 속한 에드먼드 예거가 제작을 맡았다. 1907년에 까르띠에는 예거와 협업해 뛰어난 시계를 다수 발매했다. 핸드와인딩, 옐로골드와 핑크골드 케이스, 34.9× 24.7mm, 까르띠에 파리 제품.
Nick Welsh, Cartier Collection ⓒ Cartier
산토스 손목시계 [1916]
1916년 모델. 이 시절의 까르띠에시계는 완전한 수제품이라 판형과 크기가 조금씩 달랐다. 핸드와인딩, 예거 Cal.126, 18스톤, 18,000vph, 플래티넘과 화이트골드 케이스, 34.4×24.7mm, 까르띠에 파리 제품.
Nick Welsh, Cartier Collection ⓒ Cartier
산토스 손목시계를 탄생시킨 당사자 루이 까르띠에는 예전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대중의 마음에 맞는 상품을 늘리기 위한 사업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실용적인 기능을 지녔되, 장식 면에서는 까르띠에의 방식이 드러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하이주얼러이자 창업자 가문에서 태어난 루이 까르띠에는 서민의 기호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 그가 ‘까르띠에 스타일의 실용품’ 개발에 착수한 건 당연하다. 1900년대 이후의 까르띠에는 담배케이스, 18K 요요, 칫솔, 포커 세트 등을 제작했다. 결국 왕후장상뿐만 아니라 포드 가문, 밴더빌트 가문, 록펠러 가문, 모건 가문 등의 기업가도 까르띠에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 대중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루이 까르띠에의 유연함에 있었다.
그럼 그가 하이주얼러 장인답지 않은 시야를 지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한스 나델호퍼(Hans Nadelhoffer)의 저서 <까르띠에(Cartier)>를 읽으면 시계라는 ‘실용품’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델호퍼는 그 책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까르띠에의 시계 판매량은 까르띠에가 뤼 드 라 페(Rue de La Paix)로 이전하기 전해인 1898년부터 부친을 돕기 시작한 루이가 시계에 강한 관심을 보이면서 급증했다. 시계 부문에 관한 그의 목표는 세 가지다. 첫째, 회중시계 외에 탁상시계 판매에 착수한다. 둘째, 까르띠에 시계 공방을 설립한다. 셋째, 루이 까르띠에가 가장 유망하다고 생각한 시계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그 후에 보인 행동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듯, 시계는 루이 까르띠에를 완전히 매혹했다. 무브먼트 제작자인 모리스 쿠에와 에드몬드 예거와의 관계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 외에도 그들은 다양한 형태로 시계를 함께 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묘하면서도 루이 까르띠에다운 것이 전기시계다. 1935년부터 38년에 걸쳐 그는 400점 남짓한 전기시계를 제작하고, 데르비컬이라는 전문회사까지 설립했다. 나치 기갑사단이 폴란드 국경을 넘지 않았다면, 고정밀 전기시계를 만들겠다는 그의 야심은 아마 커다란 결실을 후세에 물려주었을지도 모른다. 모리스 쿠에에게 미스터리 클락을, 잔 투생(Jeanne Toussaint)에게 호화로운 하이주얼리를 만들게 한 루이 까르띠에는 이처럼 실용품을 존중하는 감각도 지녔던 것이다.
Cartier Archives ⓒ Cartier
생 시르에서 비행 테스트에 임하는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 직접 만든 15형 비행기에 타고 있다. 촬영 시기는 1907년 3월이다. 장갑을 껴서 보이지 않지만, 그는 당시에도 산토스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Cartier Archives ⓒ Cartier
산토스 뒤몽과 식사를 하는 루이 까르띠에. 높이가 부자연스럽게 높은 테이블은 비행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참고로 산토스가 루이에게 회중시계의 불편함을 호소한 것은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 맥심 드 파리(Maxims de Paris)에서의 일이었다.
Cartier Archives ⓒ Cartier
산토스의 판매 기록은 1911년 2월 16일의 장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까르띠에 가문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모델은 1904년의 것과 동일하다고 한다. 1915년에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똑뛰(Tortue)와 산토스였다.
Cartier Archives ⓒ Cartier
까르띠에 가문의 2대손 알프레드 까르띠에(오른쪽에서 두 번째)를 둘러싼 세 명의 아들. 왼쪽부터 피에르 까르띠에, 산토스를 낳은 루이 까르띠에, 그리고 자크 까르띠에.
그는 디자인에 대해서도 독특한 심미안을 지녔다. 19세기 후반 이후 까르띠에가 주얼리에서 즐겨 사용한 디자인은 장식이 많고 대칭적인 갈런드(Garland)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1906년경까지 까르띠에의 디자이너들은 루이의 지시 아래 기하학적인 주얼리도 만들어냈다. 시대에 상관없이 까르띠에는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근무했다. 하지만 20세기 초부터 1910년대 말까지(나델호퍼는 1971년경이라 지적한다)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창업자 출신인 루이 까르띠에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계에 대한 루이 까르띠에의 열정과 독특한 디자인 감각은 어떤 계기를 통해 시계로 결실을 맺는다. 바로 브라질 출신의 비행가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과의 만남이다. 1897년 이후 산토스는 기구나 비행선으로 파리 상공을 여러 차례 비행했고, 1901년 10월에는 직접 만든 비행선을 타고 에펠탑 주위를 30분간 비행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런 산토스는 친구 중 한 사람에게 비행선을 조작하는 중에는 회중시계를 보기가 불편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는데, 그 친구가 루이 까르띠에였다. 그는 버클과 벨트로 손목에 시계를 고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한다.
SANTOS-DUMONT
산토스의 또 다른 후계자
산토스 뒤몽 LM
산토스를 드레스 워치로 개량한 제품. 원형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확실히 더 얇은 드레스 워치가 되었다. 핸드와인딩 Cal.430MC, 18스톤, 21,600vph, 약 40시간 파워리저브, 핑크골드, 30m 방수, 2090만원.
손목시계뿐 아니라 스포츠워치의 효시이기도 한 산토스 손목시계. 또한 이 시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착용할 수 있는 시계의 시초였다. 이 시계의 첫 주인인 산토스 뒤몽의 생활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비행 중에 커피를 마시려고 긴급 착륙할 정도로 멋쟁이인 그가 소위 ‘야만스러운’ 시계를 좋아할 리가 없다.
회중시계에 대한 불만도 생 시르의 비행장이 아닌 파리의 맥심 드 파리에서 듣게 된 루이 까르띠에는 실용적인 동시에 우아한 디자인의 시계를 만들고자 했다. 산토스가 그 시계를 열광적으로 애용하면서 루이 까르띠에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산토스 손목시계가 지닌 우아한 면을 강조한 시계가 바로 멋쟁이 산토스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산토스 뒤몽이다. 산토스의 가장 큰 특징인 스크루 고정 베젤을 없애고 최대한 간결하게 개량했다. 까르띠에 애호가라면 아마도 산토스 뒤몽의 원형이 여성용 시계인 ‘산토스 드모아젤(Santos Demoiselle)’인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2005년에 처음 발표한 산토스 드모아젤은 산토스의 디자인을 순화한 첫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남성용인 산토스 뒤몽은 산토스 드모아젤의 디자인에서 착안해 날렵하게 완성했다. 케이스 두께는 불과 5.58mm. 아울러 헤어라인 피니시와 로듐 마감을 거친 다이얼은 드레스 워치다운 인상을 더욱 강조한다. 시곗바늘도 푸른색이 아니라 검게 산화시킨 스테인리스스틸이다.
드레스 워치의 특징을 강화한 산토스. 그 옛날의 멋쟁이 산토스 뒤몽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히 이 시계를 차고 비행기나 레스토랑에 앉아 있을 것이다. 굳이 산토스 뒤몽이라 명명한 센스에는 경의를 표한다.
베젤을 없앤 케이스. 윗면을 미러 피니시로, 옆면을 헤어라인 피니시로 마감한 것은 산토스의 전통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글라스를 조금 돌출시켜 베젤에 흠집이 잘 생기지 않도록 했다.
헤어라인 마감한 로듐 다이얼. 지금의 드레스 워치에서는 일반적인 사양이지만, 까르띠에에서는 극히 드문 시도다. 검 모양 시곗바늘도 역시 드레스 워치의 전통에 따라 산화 처리해 검은색을 띤다.
얇게 완성한 케이스. 베젤을 생략한 투피스(Two Piece) 구조다. 러그도 기존 산토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 드레스 워치다운 모습을 위해서 필수적인 연출이다.
케이스 옆면과 크라운. 깊게 파낸 케이스는 그 자체로 크라운 가드 역할을 겸한다. 원형의 조형을 살리면서 역동적인 느낌을 담아내고자 한 것일까. 사파이어 카보숑 세공이 보여주는 것처럼 크라운의 마감도 매우 뛰어나다. 코인 마감은 아니지만, 보기 드문 7각형 크라운은 의외로 손가락에 닿는 촉감도 좋다.
케이스 옆면과 러그. 91페이지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갈베에 비하면 분명 러그가 길다. 이 모델도 케이스의 마감은 우수하다. 선명한 헤어라인을 균일하게 넣는 마감은 현재 까르띠에의 특징이기도 하다.
SANTOS 100
크기를 키우고 스포츠워치로 거듭나다
산토스 100 LM
산토스 100주년 기념 모델. 드레스워치의 성격이 강한 산토스 뒤몽에 비해 역동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다. 셀프와인딩 Cal.049MC, 23스톤, 28,800vph, 약 42시간 파워리저브, 스테인리스스틸과 옐로골드, 51.1ⅹ41.3mm, 100m 방수, 1170만원.
산토스 뒤몽을 산토스의 드레스 워치라 한다면, 역동적인 성격을 강조한 모델은 산토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산토스 100이다. 2004년 첫선을 보인 이후 매년 라인업을 늘리며 현재 까르띠에를 대표하는 컬렉션이 되었다.
기존 산토스와 크게 다른 점은 케이스의 크기와 두께다. 크기가 커진 덕분에 방수 성능은 30m에서 100m로 향상했다. 본격 스포츠워치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제원이지만, 스크루로 고정하는 케이스백을 감안하면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산토스 뒤몽은 친구와의 약속을 담아낸 드레스워치였다. 한편 산토스 100을 보면, 스포츠워치의 성격을 강조한 시계임을 알 수 있다. 스포츠워치답게 두꺼운 베젤을 일례로 들 수 있으며, 옆면이 좁아지지 않는 러그도 그렇다. 넓은 베젤은 방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굵은 러그도 크고 무거워진 시계에 꼭 필요한 요소.
현재 스포츠워치에서는 이런 조건들이 필수는 아니다. 그저 강인한 분위기를 담기 위해 까르띠에가 일부러 채택한 것일 터이다. 세부에 손을 대서 시계의 성격을 바꾸는 일은 시계 업계의 정석이지만, 산토스만큼 성공적인 예는 드물다. 물론 지금의 까르띠에가 수완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1세기 이전의 시계에게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산토스는 사람과 시대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대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간판인 것이다.
스크루로 고정한 베젤. 두께가 늘어났기 때문에 글라스도 베젤만큼 솟아올랐다. 그 결과 100m 방수를 실현했다. 베젤 표면의 마감도 2004년 모델보다 최신 모델 쪽이 당연히 더 좋다. 미러 피니시 면의 왜곡은 줄어들고 시계의 외관도 아주 깔끔해졌다.
표면을 약간 거칠게 처리한 유백색 다이얼. 역동적인 분위기를 위해 시곗바늘도 굵어지고, 야광 도료를 칠했다. 하지만 산화 처리로 만든 검은색과 미세하게 가늘게 마무리한 인덱스는 드레스워치 고유의 인자다. 그 미묘한 가감에서 까르띠에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두꺼워진 케이스 옆면. 그래도 실제 두께는 10.34mm에 불과하다. 케이스 전체를 둥글게 굴려 손목 위에서는 이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산토스의 장점 중 하나인 착용감은 다부지고 당당한 산토스 100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
현재 산토스의 특징인 크라운 가드. 베젤과 마찬가지로 최신 모델 쪽이 마감이 좋다. 모서리는 더욱 예리해졌고, 헤어라인도 편차가 없다.
케이스 옆면과 러그의 모습. 스포츠워치답게 러그는 짧고 굵다. 또한 무거워진 시계를 지탱하기 위해서인지 스트랩은 핀이 아닌 굵은 스크루로 케이스에 고정한다.
문의 까르띠에 1566-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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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appeared in Chronos Japan
게재호
42호(2016년 01/02월)
글
히로타 마사유키(Masayuki Hirota,
Editor
유현선
사진
요시에 마사노리(Photographs by Masanori Yos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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