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 OF THE WATCH INDUSTRY - PART 2

스위스 시계산업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물들은 누구인가? 쿼츠의 역풍을 정면으로 응시한 그들은 미래에 대한 혜안을 가지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보통의 눈으로 보자면 현실을 역행하는 그들의 발상은 기인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경제는 다시 호황을 맞이했고, 사람들의 가치관도 바뀌었으며 기술은 더 발전했다. 결국 신념을 가진 그들은 승리했고, 스위스 시계산업은 부활했다. 위대한 워치메이커와 엔지니어 그리고 경영자들의 이야기.

내용

IWC의 아이콘 ㅣ 커트 클라우스

KURT KLAUS(1934~)

Achievement 

퍼페추얼 캘린더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 완성. IWC 인하우스 무브먼트의 기틀을 세움.


Biography

1934년 스위스 생 갈 출생. 1957년 IWC입사. 1985년 다 빈치 퍼페추얼. 1993년 일 데스테리에로 스카푸시아(Il Destriero scafusia). 

2000년 포르투기즈. 2000, 2003년 포르투기즈 퍼페추얼. 2004년 포르투기즈 미스테르 발표.



한 명의 스승, 알버트 펠라톤

커트 클라우스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펠라톤 와인딩 시스템으로 이름이 알려진 IWC의 또 다른 거장 엔지니어, 알버트 펠라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커트 클라우스에게 있어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무브먼트를 강에 집어 던져버릴 만큼 완벽주의자였던 펠라톤은 메커니즘의 완성도에 집착했다. 커트 클라우스가 솔로투른(Solothurn)의 시계 학교를 마치고 IWC에서 은퇴할 때까지 42년간을 한 회사에서 보낼 수 있었던 데는 아마도 펠라톤에게서 이어받은 열정과 정신도 한몫을 했으리라. 견고함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 정의할 수 있는 IWC의 ‘엔지니어링 정신’은 펠라톤을 거쳐 클라우스로 전해진 것이다. 클라우스는 워치메이커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IWC에서 성장해 엔지니어의 영역에 도달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또 한 명의 친구, 다 빈치 퍼페추얼

IWC를 회생시키기 위해 커트 클라우스는 퀸터 블륌라인에게 퍼페추얼 캘린더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개발팀을 홀로 지키던 클라우스는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기어를 깎아 다 빈치 퍼페추얼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프로토타입의 베이스 무브먼트는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889였다. 3mm의 얇은 두께와 높은 신뢰성을 자랑하는 자동 무브먼트는 복잡하고 두꺼운 퍼페추얼 캘린더를 구동하기에 적격이었다. 그러나 예거 르쿨트르에서는 일체형 무브먼트를 생산하지 않은 탓에 실제 생산 모델에는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밸주 7750이 투입되었다. 중요한 베이스 무브먼트가 교체되었음에도 다 빈치 퍼페추얼 캘린더의 모듈은 문제없이 작동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모든 조작을 크라운 하나로 가능하도록 한 사용자 친화적인 구조는 엔지니어로서 커트 클라우스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왼쪽)다 빈치 퍼페추얼 캘린더. (오른쪽)2009년 <크로노스>코리아의 표지를 장식한 포르투기즈 투르비용 미스테르.



매뉴팩처 IWC의 토대

현재 IWC는 2개의 수동 무브먼트, 2개의 자동 무브먼트와 1개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갖추고 있다. 불과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매뉴팩처로 변신에 성공한 셈이다. 2000년은 IWC의 미래를 제시한 중요한 해였다. 포르투기즈 2000으로 포르투기즈 라인을 완전히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인하우스 무브먼트(칼리버 5000 탑재) 시대를 연 것. 커트 클라우스는 리버서 방식에 비해 간결한 구조의 펠라톤 와인딩 시스템을 칼리버 5000에 이식해 IWC 엔지니어링의 전통을 이어간다(이 시스템은 또한 파르미지아니가 설계한 L.U.C 무브먼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커트 클라우스는 일단 가장 핵심적인 무브먼트가 완성되자 이를 활용해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시계를 만들고자 했다. IWC 파일럿 라인의 기함이 된 빅 파일럿이 발표됐고, 곧이어 퍼페추얼 캘린더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미 다 빈치 퍼페추얼로 이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달성했지만 새로운 베이스 무브먼트에 어울리는 수정과 진화가 필요했던 것. 2003년 발표한 포르투기즈 퍼페추얼은 다 빈치 퍼페추얼을 베이스로 남반구와 북반구의 문페이즈를 동시에 표시하는 기능을 갖춘 모습으로 등장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10년간 거의 매년 새로운 모델을 통해 라인업을 확립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새로운 무브먼트를 선보이는 왕성함 덕에 IWC는 큰 성장을 이룬다. 커트 클라우스는 2003년 플라잉 투르비용인 포르투기즈 미스테르를 마지막으로 개발 현장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 후에도 IWC의 테크니컬 앰배서더로서 전 세계를 순회하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시간 측정에 몰두한 인생 ㅣ 잭 호이어

JACK HEUER(1932~)

Achievement 

호이어의 전성기 구축, 크로노그래프 역사상 최고로 평가받는 모델 까레라 완성, 세계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개발.


Biography

1932년 스위스 베른 출생. 1958년 호이어 입사. 1963년 까레라 발표. 1969년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1과 모나코 발표. 

1982년 호이어 퇴사. 1999년 태그호이어 고문 취임. 2001년 태그호이어 명예회장 취임.



까레라 파나메리카나 랠리

잭 호이어에게 있어서 시계는 곧 가업을 의미했다. 그가 아버지 찰스 호이어의 뒤를 이어 엔지니어로 입사함으로써 호이어사의 가족 경영은 4대째 지속된다. 호이어는 스톱워치와 크로노그래프 워치의 생산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경영 면에서 불안정한 작은 회사였다. 그의 삼촌이 회사의 지분을 매각하려고 했을 때 잭 호이어는 삼촌 지분의 일부를 매입했고, 아버지의 지분까지 물려받으면서 경영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호이어의 독립 경영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이름도 여러 번 바뀌어야 했다. 호이어는 1960년대 초반 레오니다스에 합병되어 ‘호이어 레오니다스’가 되었다가, 1985년에는 당시 호이어의 주인인 피아제가 호이어를 F1 머신의 터보 엔진을 제작하는 태그(Techniques d’Avant Garde)사에 매각하면서 ‘태그호이어’가 된다. 물론 호이어의 황금기에는 엔지니어로서 잭 호이어가 기여한 바 크다. 1950년 멕시코를 종단하는 파나메리카나 고속도로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까레라 파나메리카나 랠리’에 매료당한 그는 1963년 기념비적인 ‘까레라’를 선보인다. 측정 분야에서 활약한 호이어에게는 기록이 중요한 랠리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테마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는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시대였고, 무브먼트는 풍부했다. 걸작 무브먼트로 손꼽히는 밸주 칼리버 72를 위시해 다양한 밸주와 란데론 칼리버를 까레라에 탑재했다. 로흐(Rehaut: 베젤의 안쪽 부분)에 타키미터를 배치하거나 1/5초 측정이 가능한 정밀한 인덱스를 넣기도 했는데 이후의 크로노그래프 형식에 큰 영향을 끼친 부분이다.



칼리버 11, 크로노마틱

1969년 세계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11이 발표된다. 이것이 호이어, 브라이틀링, 뒤부아 데프라, 뷰렌(현재 해밀턴에 합병)이 연합해 만든 ‘크로노마틱’이다. 잭 호이어와 윌리 브라이틀링은 자동 무브먼트의 시대를 예감했고, 그 필요성을 절감했다. 둘은 크로노그래프 분야에서 경쟁자이긴 했지만 두 회사의 주 종목이 각각 모터 스포츠와 파일럿 워치로 달랐기 때문에 공동 개발에 합의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크로노그래프 기술을 가진 뒤부아 데프라와 마이크로 로터 방식의 자동 무브먼트 기술(1954년 특허 취득한 인트라매틱)을 가진 뷰렌을 끌어들였다. 사실 잭 호이어가 원한 것은 같은 해 등장한 제니스의 엘 프리메로 같은 일체형 자동 크로노그래프였다. 하지만 시간과 예산 모두가 부족했으므로 마이크로 로터 자동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올리는 형태로 완성됐다. 호이어는 칼리버 11 크로마틱을 가장 먼저 오타비아에 탑재했다(브라이틀링은 크로노마틱 모델에 탑재). 그 후 정사각형 크로노그래프인 모나코는 1969년 완성되었다. 칼리버 11을 장착한 모나코는 사각형 시계와 크로노그래프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모델이다. 30m 방수를 실현한 이중 케이스는 당시 가장 진보된 형태였다. 모나코는 스티브 매퀸의 영화 <르 망(Le Mans)>으로 인해 유명세를 탔는데 이는 PPL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다.

1969년 선보인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호이어의 귀환

1982년을 끝으로 그는 호이어를 떠난다. 그는 호이어에 몸담고 있는 동안 전공을 살려 1/100초 측정이 가능한 쿼츠 스톱 워치인 마이크로스플릿 800(Microsplit 800)과 크로노그래프 크로노스플릿(Chronosplit)을 만들었다. 호이어를 나온 후 그는 전혀 다른 분야인 전자 회사에서 시간을 보낸다. 1999년 CEO 장 크리스토프 바빈의 권유로 그는 다시 태그호이어로 복귀한다. 태그호이어가 모터 스포츠와 함께 성장한 호이어 시절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잭 호이어의 노하우와 열정이 필요했다. 그가 돌아온 후 혼란스럽던 태그호이어의 라인업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태그호이어를 관통하는 ‘S/el’ 즉 스포츠 엘레강스라는 콘셉트는 호이어 시절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태그호이어가 낳은 링크, 아쿠아 레이서의 기저에는 전통의 까레라와 모나코가 든든히 버티고 있다. 2001년 명예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잭 호이어는 엔지니어였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그의 탄생 80주년인 2012년, 태그호이어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까레라 모델을 바젤월드에서 선보였다. 호이어 로고와 디자인을 그대로 살린 까레라는 그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브랜드가 보내는 최대의 찬사일 것이다.

잭 호이어 탄생 80주년을 기념하는 까레라. 브랜드의 간판인 까레라 역시 그의 업적이다.




영국 워치메이킹의 보루 ㅣ 조지 다니엘스

GEORGE DANIELS(1926~2011)

Achievement 

이스케이프먼트의 진화.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의 완성. 


Biography

1926년 영국 런던 출생. 1969년 자신의 첫 모델 완성. 1980년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 특허취득.

1999년 코-액시얼을 처음 사용한 오메가 드빌 발표. 2010년 CBE (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 작위.



영국 워치메이킹의 자존심
과거 영국이 배출한 인물을 보자. 마린 크로노미터를 발명한 존 해리슨, 이스케이프먼트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한 존 아놀드와 토머스 머지, 조지 그라함 등 걸출한 이름들을 열거할 수 있다. 조지 다니엘스는 이들의 적통을 계승한 워치메이커였다. 2011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영국 워치메이킹의 명맥이 한층 희미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40년대 후반, 군대를 제대한 다니엘스는 퇴직금 50파운드로 시계 수리점을 열었다. 그는 영국이 배출한 워치메이커의 업적을 보며 시계에 대한 흥미를 키웠고, 특히 이스케이프먼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 무렵 그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이스케이프먼트, 코-액시얼을 세상에 내놓았다. 선대 워치메이커의 유산을 꾸준히 연구한 결과였다. 코-액시얼은 처음에는 ‘주유가 필요 없는’ 이스케이프먼트로 세간에 알려졌다. 물론 주유의 주기가 좀 더 길어진 부수적인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코-액시얼의 핵심은 바로 정확성, 시계의 본질인 ‘크로노미터’를 실현하는 것에 있었다. 무브먼트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심한 부분이자 동력의 소모가 큰 부분이 이스케이프먼트였고, 등시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주목한 다니엘스는 하나의 축에 이스케이프먼트 휠과 피니언을 얹고 4개의 주얼이 달린 앵커를 이용해 이스케이프먼트에 가해지는 부담을 덜어주었다. 결과적으로 마찰이 작아진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는 효율적인 동력 효율을 선보일 수 있었고, 이를 장착한 밸런스 휠(칼리버 8500을 기준)은 20㎎/㎠가 넘는 관성 모멘트를 가지게 되었다(투르비용 구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관성 모멘트는 약 10㎎/㎠다).


코-액시얼 날개를 달다
원래 코-액시얼은 다니엘스에 의해 1975년에 고안되어 1980년에 특허를 취득했다. 개발자 다니엘스는 새로운 이스케이프먼트의 상용화를 이루기 위해 여러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파텍 필립도 그중 하나로 슬림 무브먼트에 코-액시얼을 적용한 테스트까지 시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 계획을 접는다. 다니엘스는 코-액시얼을 회중시계용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지름이 훨씬 작은 손목시계에 구현하기 위한 소형화 작업은 특히나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코-액시얼의 특허도 거의 끝나갈 무렵 다니엘스는 오메가에서 연락을 받는다. 명가의 재건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이던 오메가로서는 독자적인 무브먼트를 갖추는 일 또한 시급했다. 메가 매뉴팩처로 명성을 누리는 오메가였으니, ETA의 범용 무브먼트에 언제까지나 의지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이스케이프먼트는 기계식 시계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계획대로만 된다면 큰 파급력을 몰고 올 만했다. 니콜라스 하이에크에 의해 코-액시얼의 상용화가 단행됐고, 수 년의 개발 끝에 오메가는 이를 이뤘다. 사실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사용한 오메가의 첫 모델은 1999년의 드 빌이었다. ETA 칼리버 2892에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를 이식한 칼리버 2500을 탑재한 리미티드 에디션. 그러나 기존 무브먼트를 베이스로 한 칼리버 2500은 계속된 수정 작업을 필요로 했다. 수정과 개선이라는 작업은 하나의 무브먼트가 완성되는 데 있어서 당연한 수순이지만, 오메가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칼리버 8500은 칼리버 2500과 달리 설계 단계에서부터 코-액시얼을 염두에 둔 무브먼트였다. ETA, 니바록스, 프레드릭 피게의 공동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지만, 결국 ETA의 주도로 칼리버 2500 이후 8년 만에 완성된 칼리버 8500은 코-액시얼의 ‘완성판’이다. 다니엘스는 코-액시얼을 통해 이스케이프먼트의 진화와 영국 워치메이킹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다시금 알릴 수 있었지만, 말년을 맨(Mann) 섬의 작업실에서 보내며 자신만의 시계를 만들었다. ACHI의 멤버로서 활동한 그는 스크루와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만들며 진정한 핸드 메이드 워치의 세계를 지향했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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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빌 아워비전 애뉴얼 캘린더. 코-액시얼 이스케이프먼트는 시계의 본질인 정확성을 실현하기 위한 조지 다니엘 스의 집념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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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빌 최초로 코-액시얼을 장착한 모델.

내용

모던과 클래식의 연금술사 ㅣ 게르트 랑

GERD R. LANG(1944~)

Achievement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재해석. 기계식 시계의 부활에 기여함. 


Biography

1944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1964년 호이어 입사. 1980년 마스터 워치메이커 자격 획득.

1983년 크로노스위스 설립. 2012년 크로노스위스 매각.



재규어 XK120에 빠져들다

워치메이커나 엔지니어들은 어린 시절부터 기계를 좋아하는 성향을 보이곤 한다. 게르트 랑 역시 그랬다. 빈티지 재규어 XK120로 빈티지 카 레이스에 참가해 우승한 전력이 있으며, 자신의 브랜드를 상징하는 컬러로 ‘브리티시 그린’을 택했을 정도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워치메이커가 되기 위해 견습공의 길을 택했고, 이는 적성에도 잘 맞았다. 호이어사에 입사해 비엘에 있는 크로노그래프와 스톱워치 생산 파트에서 일하게 된 그는 곧 크로노그래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쿼츠 파동은 호이어에도 대규모 감축을 가져왔고, 퇴직금 대신 받은 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와 각종 파트를 가지고 그는 CS센터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랑은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된다. 쿼츠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한물간 기계식 시계를 수리하며 계속 사용하길 원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기계식 시계의 미적 가치에 대한 확신을 되새겼다. 그를 완전히 매혹한 재규어 타입 C와도 같은 본질을 기계식 시계에서 발견한 것이다.



크로노그래프가 아닌 크로노스코프

1982년 게르트 랑은 수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밸주 7734에 문페이즈 모듈을 올린 모델을 내놓았다. 크로노스위스의 공식적인 첫 번째 모델이다. 특히 이 시계는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로 뒷면을 처리해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냈는데, 이후의 소위 ‘시스루 백’ 유행에 도화선 역할을 한다. 크로노그래프를 요리하는 일에 랑은 탁월한 기지를 발휘했다.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를 다시 스켈레톤 버전으로 만들거나, 카이로스 크로노그래프(단종된 예전 모델)처럼 시침과 분침을 오프 센터 카운터로 옮긴 독특한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1분을 측정할 수 있는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더한 레귤레이터에 ‘크로노스코프’라는 이름을 붙이며 크로노그래프의 의미를 재정의하기도 했다(크로노(Chrono, 시간)와 스코프(Scope, 보다)를 합성한 모델명은 크로노그래프의 그래프(Graph)가 ‘그리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보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



모던과 클래식 사이

시·분·초침이 각각의 축을 가진 레귤레이터는 크로노스위스 최대의 히트작이다. 당시 이런 디자인은 세인들에게 거의 잊혀진, 그래서 오히려 신선한 것이었다. 랑은 또한 200년 전에 유행한 커다란 양파 형태의 크라운을 채택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회중시계와 빈티지 시계에서 받은 영감을 그만의 방식으로 크로노스위스에 접목한 것. 레귤레이터를 비롯해 점핑 아워와 레트로그레이드를 장착한 델피스, GMT 워치인 토라, 디지털 방식처럼 시간을 표시하는 디지터 등의 근원에는 클래식이 자리하고 있다. ETA를 주요 무브먼트로 사용하긴 하였지만 재고로 남아 있는 에니카(Enicar)와 마빈(Marvin) 무브먼트를 손봐서 사용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양파 모양의 크라운, 코인 베젤 등 크로노스위스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모델, 레귤레이터.


 

ETA 7750을 스켈레톤 처리한 그랑 오푸스 스켈레톤.



미완의 꿈 그리고 새로운 출발

랑이 시계 인생 후반기에서 보여주고 싶어 한 것은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서 만든 시계였다. 2009년 그는 데드비트 세컨드 방식의 ‘소테렐’을 선보였고,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이는 ‘스위스 메이드’가 아닌 ‘메이드 인 저머니’를 달고 생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거대 그룹에 속하지 않은 채 독립 메이커로 입지를 유지하기란 어려움이 많았고, 칠순을 앞둔 노령의 워치메이커에게는 더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것이다(소테렐은 잠정보류됨). 2012년 크로노스위스는 새로운 주인, 올리버 엡스타인을 맞이했다. 랑은 자신이 30년간 이어온 브랜드의 전통과 아이덴티티를 유지해나갈 사람이 크로노스위스를 인수하길 원했고, 그의 바람에 가장 부합하는 적임자를 찾았다. 랑은 이제 크로노스위스에서 고문 역할을 하며 한발 물러서서 그의 브랜드를 바라보게 되었지만, 크로노스위스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시계업계의 보헤미안 ㅣ 빈센트 칼라브레제

VINCENT CALABRESE(1944~)

Achievement 

손목시계용 플라잉 투르비용의 고안. 카루셀의 현대화. AHCI의 공동설립자.


Biography

1944년 이탈리아 나폴리 출생. 1977년 스파샬(Spatiales)로 골드 메달 수상(Gold medal at the international inventor’s show in Geneva). 

1980년 코룸 골든 브리지. 1984년 AHCI설립 1989년 블랑팡 플라잉 투르비용. 2004년 NHC설립. 2008년 블랑팡 카루셀.



이탈리아 태생의 빈센트 칼라브레제는 시계에 대한 정규 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인물이다. 17살에 스위스로 이주한 그의 첫 직업은 시계와 보석을 취급하는 판매점의 매니저였고, 워치메이킹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가 시계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로잔의 한 시계 판매점을 인수하게 되면서부터. 남는 시간을 시계와 씨름하는 데 할애하면서 그의 인생은 바뀐다. 칼라브레제의 천재성은 1977년 ‘스파샬’이라는 시계로 상을 받으면서 꽃피기 시작했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워치메이커의 경력은 독학으로 시계를 배웠다는 것이 전부였다.



보이지 않는 손

1989년 블랑팡이 ‘최초’라고 기록하는 손목시계용 플라잉 투르비용이 세상에 나온다. 브리지를 없애서 마치 케이지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플라잉 투르비용은 1920년대 독일의 알프레드 헬비그에 의해 고안되었지만, 이것의 소형화와 경량화에 성공한 것은 블랑팡이었다. 그러나 이 플라잉 투르비용의 설계는 블랑팡 내부가 아닌 외부의 개발자, 빈센트 칼라브레제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사자와 블랑팡 간의 비밀 협약이었다. 2008년 그가 카루셀의 개발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서 이 사실은 밝혀진다. 플라잉 투르비용이 그랬던 것처럼, 카루셀은 실용성이 떨어져 도태된 메커니즘이었다. 과거 회중시계에 구현된 카루셀은 무겁고 에너지 소비가 커서 회전이 느렸던 것. 칼라브레제는 이를 완전히 개선해 1분에 1회전하는 카루셀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는다. 코룸의 대표작인 골든 브리지 (1980년) 역시 칼라브레제의 손에서 태어난 모델이다. 배럴에서 밸런스까지 일자로 연결되어 마치 다리처럼 긴 독특한 무브먼트를 감상하기 좋도록 케이스의 사방이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되어 있다. 이후 골든 브리지는 칼라브레제의 이름을 달고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벨앤로스의 점핑 아워 빈티지 123 오르 소테르도 칼라브레제가 탄생시킨 모델이다.


코룸의 대표작, 골든 브리지 역시 칼라브레제의 작품. 다리를 연상시키는 무브먼트를 장착한 이 모델은 이후 다양한 변형 모델이 탄생했다.


르 브라쉬스 카루셀 미니트 리피터. 칼라브레제는 무겁고 에너지 소비가 커서 사용되지 않던 메커니즘 카루셀을 실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AHCI를 만들다

어떤 브랜드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시계 제작자들의 연합 ACHI(Académie Horlogère Des Créateurs Indépendants)를 설립한 것도 빈센트 칼라브레제다. 1984년 그가 스벤 엔더슨과 더불어 AHCI를 만든 건 기계식 시계에 있어서 수공의 아름다움과 장인정신, 예술적 가치가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세상에 일깨우고 싶어서였다. AHCI의 멤버에는 쟁쟁한 인물이 많았다. 프랭크 뮬러나 프랑수아 폴 주른은 독립 시계 제작자임에도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케이스. 그러나 안타깝게도 AHCI의 위상은 예전과 같지 않다. 대표적 얼굴이던 필립 듀포와 그를 위시해 여러 명의 멤버가 AHCI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그들만의 조직을 세웠다. 또한 자신의 재능을 영리하게 포장할 줄 아는 젊은 워치메이커들이 AHCI라는 울타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칼라브레제 자신도 사실상 독립 제작자라고 말할 수 없다. 2004년 자신의 브랜드 NHC를 론칭하며 자신의 시계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는 브랜드에 소속되는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모를 그의 결정은 어찌 보면 자유로운 그의 영혼에서 빚어진 바가 큰 것 같다. 그의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시계들이 그렇듯, 마치 삶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오랜 기간 교감을 나눠온 브랜드(블랑팡)를 자신의 둥지로 선택한 만큼, 머지않아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탁월한 기업가 ㅣ 장 클로드 비버 

JEAN-CLAUDE BIVER(1949~)

Achievement 

블랑팡과 기계식 시계의 부활에 공헌함, 위블로의 재건.


Biography

1949년 룩셈부르크 출생. 1975년 오데마 피게 입사. 1980년 오메가 프로덕트 매니저. 1983년 블랑팡 재설립. 2004년 위블로 CEO취임.



시계의 계곡에 사로잡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생활에 지친 장 클로드 비버는 자연을 즐기기 위해 발레 드 주(Vallee de Joux)로 향한다. 그곳의 한 농가에서 지내던 그는 시계업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자케 피게였다. 자케 피게는 에보슈 메이커 프레드릭 피게를 경영하고 있었고, 피게의 공방에 들른 비버는 시계에 매혹된다. 비버는 자케 피게의 아버지 프레드릭 피게의 도움을 받아 오데마 피게에 입사할 기회를 얻는다. 오데마 피게에서 유럽 세일즈 매니저까지 지낸 비버는 이후 오메가로 둥지를 옮겼고, 다시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발레 드 주로 돌아간다. 아마도 그의 시계 인생의 본향과도 같은 그곳이 언제나 마음속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 같다.



블랑팡의 재설립

1981년 블랑팡을 SSIH로부터 인수한 비버는 자케 피게와 함께 그 재건을 모색한다. 1735년 설립된 유서 깊은 브랜드지만 파산으로 시계 제조를 중단한 지 오래되어 회사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간신히 브랜드 이름만 남은 상태, 모든 것을 무에서 시작해야 했다. 비버가 피게와 함께 일하기로 한 것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피게의 에보슈 제조 능력에 힘입은 블랑팡은 1983년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트리플 캘린더와 문페이즈 기능을 갖춘 시계를 출시했다. 1984년부터는 6년에 걸쳐 기계식 시계만의 특성을 함축한 모델을 선보였다. 여기에는 가장 작은 미니트 리피터, 최초의 자동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와 8 데이즈 투르비용이 있었으며 울트라 슬림, 퍼페추얼 캘린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에 6대 걸작(타임 온리 모델 포함)이라는 타이틀로 이들을 모은 세트가 판매됐는데, 이는 기계식 시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전통과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1991년에는 이 6개 모델을 하나의 시계에 집대성한 그랑 컴플리케이션 ‘1735’를 선보이며, 기계식 시계의 완전한 부활을 선언했다. 시계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1735 르 브라쉬스. 블랑팡이 야심차게 선보인 ‘6대 걸작’을 하나의 컴플리케이션 워치에 집약한 모델.



위블로의 희망

비버는 블랑팡을 궤도에 올린 후 스와치 그룹에 지분을 매각했다. 스와치 그룹에 들어간 비버는 하이에크 회장의 오른팔로 떠올랐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의 건강 상태는 그렇지 못했다. 레지오넬라 병에 걸린 이후부터 매년 폐렴이 재발했던 것이다. 결국 회사를 떠난 비버는 2004년의 바젤 월드를 아무런 소속이 없는 상태에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불안과 방황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6월 그는 위블로의 CEO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인지도가 전무했던 위블로의 주 무기는 이종결합이었다. 전통적인 골드와 러버 밴드를 믹스앤매치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꽤 획기적인 전법이긴 했다. 비버는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빅 뱅’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설립자 카를로 크로코의 이종결합 콘셉트를 ‘퓨전’으로 확장한 것이다. 비버에게 있어서 시계에 사용할 수 있는 소재란 세라믹, 텅스텐, 마그네슘, 탄탈 등 무궁무진했고, 컬러와 패턴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더 다양했다. 한편 그는 오메가 시절 거둔 성공을 거울 삼아 위블로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세운다. 유명인을 내세운 ‘앰배서더’ 마케팅으로 위블로의 매출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퓨전’이라는 콘셉트로 등장해 위블로의 간판 스타가 된 빅뱅. 사진은 ‘유니코 GMT’.



LVMH가 위블로를 전격 인수한 시점에 비버는 자신의 위블로 지분을 매각한다. 그의 은퇴는 어느 정도 이미 점쳐지고 있었다. 현재 그는 위블로의 일선에서 물러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비버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2세에 막내 아들을 낳았다. ‘좀 더 젊었다면 더 잘해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장과 스키 샬레를 마련했다. 그런데 그보다는 기업가로서의 정신을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걸 보여줄 수 있는 작은 브랜드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코멘트인 듯하다.어찌됐건 그는 브랜드를 일으키는 데 탁월한 수단을 발휘했고, 그가 시계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은 스위스 시계업계에겐 큰 행운이었다.





번뜩이는 천재성 ㅣ 지울리오 파피 

GIULIO PAPI(1965~)

Achievement 

컴플리케이션 공방 르노 에 파피 설립. 오데마 피게를 비롯해 하이엔드 브랜드를 위한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 제작. 기계식 시계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잘 표현함.


Biography

1965년 스위스 라쇼드퐁 출생. 1984년 오데마 피게 입사. 1986년 르노 에 파피 설립. 



귄터 블륌라인, 장 클로드 비버, 율리스 나르덴의 롤프 슈나이더는 기계식 시계의 아름다움을 믿고 사업적인 수완을 발휘한 사람들이다. 게르트 랑, 커트 클라우스, 루드비히 외슬린은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되찾고, 그 미학을 재창조한 인물들이다. 지울리오 파피는 엔지니어로서 후자의 그룹에 속하지만 이들보다는 한참 젊은 세대다. 그러나 쿼츠 시대를 어린 눈으로 목격했고,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시계 학교에 들어가고자 했다. 파피가 필자와의 이전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는 사실 단순히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시계업계가 붕괴하더라도 시계를 수리할 누군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학생보다 선생이 더 많은 학교에서 마음껏 미래의 자양분을 흡수했다. 그리고 졸업 후 첫 직장으로 오데마 피게를 선택했다.



르노와 파피, 힘을 합치다

도미니크 르노와 파피는 금세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본사에서 떨어진 발레 드 주의 공방에 배치된 워치메이커 중에서도 르노와 파피만이 타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오데마 피게에 입사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을 때 두 사람은 힘을 합해 자신들의 공방을 세운다. 1986년의 일이다. ‘르노 에 파피’를 설립한 후 파피는 연구에 집중했다. 줄곧 워치메이커로 일해온 파피에겐 엔지니어링 분야로 선회하기 위한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계에 대한 열정은 뛰어났지만, 경영에 대해서만큼은 두 사람 다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오데마 피게의 회장 메일란과 상의 끝에 르노 에 파피의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파피는 오데마 피게의 브레인을 담당하게 되었다(르노는 지분을 매각한 후 은퇴). 현재 르노 에 파피의 정식 명칭은 ‘오데마 피게 르노 에 파피’다.



파피의 전성시대

컴플리케이션 워치에 특별한 열의를 보인 파피는 약관의 20대였으나 굵직한 컴플리케이션 개발에 참여한다. 1986년 미니트 리피터 모듈을 개발할 당시에는 거장 커트 클라우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며, LHM을 이끄는 귄터 블륌라인의 의뢰로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도 했다(정확한 모델명은 언급된 바 없지만 시기상으로 유추하자면 랑에 운트 죄네의 투르비용 ‘푸르 르 메리트’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랑에 운트 죄네의 투르보그래프가 르노 에 파피에서 개발되는데 이는 푸르 르 메리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파피가 보여준 컴플리케이션의 세계는 실로 다채롭다. 토크 게이지를 최초로 사용한 로열 오크의 콘셉트, 고전적인 데탕트(로빈) 이스케이프먼트를 응용한 AP 이스케이프먼트, 스플릿 세컨드와 퍼페추얼 캘린더를 결합한 그랑 컴플리케이션 등. 오데마 피게가 아닌 다른 브랜드를 위해 완성한 경우도 다수다. 벤틀리 포 브라이틀링의 뮬리너 투르비용, 까르띠에의 로통드 드 까르띠에 그랑 컴플리케이션 스켈레톤, 샤넬의 J12 레트로그레이드 미스터리어스에서도 파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직 50대도 되지 않은 파피가 이미 구현해낸 고난이도 컴플리케이션의 세계는 놀랍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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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J12 레트로그레이드 미스터리어스 역시 파피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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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배럴 시스템으로 10일 파워리저브를 구현한 밀리너리 카본 원 투르비 용 크로노그래프.

내용

근원을 잃지 않다

파피는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은 무브먼트의 본질과도 같다’고 말했다.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피니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의 시계 철학은 자신이 연구한 클래식 시계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큰 것 같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앞서 언급한 수많은 컴플리케이션 중 상당수가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베이스로 한 모델인 것은 이와도 연관이 있으리라. 카본과 특수 소재를 한발 앞서 사용하기 시작한 오데마 피게의 이미지는 굉장히 진보적이지만, 그 근원에는 역시 어느 누구도 다시 만들려고 하지 않은 전통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가 서 있다. 물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오데마 피게와 그들의 컴플리케이션은 전통에 근거해 파피가 재창조한 현대적 형상이다. 파피가 지금까지 보여준 기계식 시계의 본질에 대한 ‘신념’ 그리고 이를 납득시키는 결과물을 완성한 ‘천재성’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연상시킨다. 젊은 그를 이전 세대와 나란히 거론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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