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스테인리스스틸

금이 아닌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든 럭셔리 시계가 등장한 건 1970년대였다. 오늘날 그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럭셔리 스테인리스스틸 시계가 출시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그리고 바쉐론 콘스탄틴의 오버시즈가 거둔 성공이 자리하고 있다.

내용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Audemars Piguet Royal Oak)

조지 골레이(Georges Golay)는 1966년부터 럭셔리 스테인리스스틸 스포츠 시계의 선구자인 오데마 피게의 CEO를 역임했다. 모험을 좋아하던 타고난 사업가에게 1971년 이탈리아의 에이전트 카를로 데 마르키(Carlo de Marchi)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주말에 보트를 탈 때나 스포츠카를 타고 나들이를 갈 때 또는 우아한 파티나 클럽에서도 찰 수 있는 다재다능한 손목시계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시계의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은 스테인리스스틸이어야 했다. 1971년 바젤 시계 박람회(현재의 바젤월드)가 개막하기 하루 전 조지 골레이는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Gérald Genta)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날까지 이에 어울리는 시계를 디자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지 골레이의 의뢰를 받고 고민에 빠진 제랄드 젠타는 어린 시절 낚시를 할 때 본 다이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다이버가 착용했던 헬멧과 잠수복을 안전하게 연결해주는 고무 패킹과 볼트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제랄드 젠타는 이 기억을 바탕으로 선박의 둥근 창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팔각형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담아낸 디자인을 완성했다. 살짝 곡선을 그리는 모서리의 팔각형 베젤과 케이스 그리고 고무 패킹을 8개의 나사로 동시에 고정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육각형 나사는 정확하게 방사상으로 베젤 위에 설치했다. 나사를 베젤이 아닌 케이스백에서 고정하고 조이도록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제랄드 젠타는 버클 쪽으로 갈수록 마디가 가늘어지는 일체형 브레이슬릿을 창조했다. 제랄드 젠타가 하룻밤 사이에 완성한 스케치는 카를로 데 마르키와 오데마 피게의 대변인이었던 찰스 보티(Charles Bauty)에게 전달됐다. 내부적으로 사파리(Safari)라는 이름이 주어진 시계를 이듬해인 1972년 바젤 시계 박람회에서 공개하려는 오데마 피게의 계획은 거침없이 진행됐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오데마 피게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럭셔리 스테인리스스틸 시계의 프로토타입은 화이트골드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화이트골드가 스테인리스스틸보다 가공이 쉽고 폴리싱 처리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오데마 피게는 2005년과 2012년에 1972년 출시작인 로열 오크에 미세한 변화를 주었을 뿐이다. 


시계는 로열 오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선박의 둥근 창을 모티프로 디자인한 로열 오크는 나무로 만든 선체를 강철로 덮어씌운 영국의 전투함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로열 오크는 출시 당시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든 시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싼 가격(3650스위스프랑)과 지름 8.8mm라는 당시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거대한 크기로 인해 초라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출시된 지 3년이 지나도록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판매된 수량은 400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일 고객들이 르쿨트르(LeCoultre)가 만든 얇은 셀프와인딩 칼리버 2121을 탑재한 이 럭셔리 스테인리스스틸 시계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로열 오크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된다. 오늘날 로열 오크는 오데마 피게를 지탱하는 핵심 모델이자 시계 포트폴리오 안에서는 마땅한 경쟁 상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다. 



 

외관과 내부 모두 매력적인 로열 오크. 매뉴팩처 칼리버 3120을 탑재했다.


2005년 오데마 피게는 2004년에 소개한 셀프와인딩 매뉴팩처 칼리버 3120을 탑재한 로열 오크(Ref.15300ST)를 출시했다. 현재 로열 오크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2012년 로열 오크 탄생 40 주년을 맞이해 새로워진 로열 오크를 구입할 수 있다. 지름 41mm의 이 모델(Ref.15400ST)에는 센터 세컨드와 날짜창이 있고, 이전 모델과 동일하게 현대 시계의 필수 요소처럼 자리 잡은 글라스백을 적용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로열 오크는 결코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뿐더러 영원히 오리지널 럭셔리 스테인리스스틸 시계로 남을 것이다. 로열 오크의 가격은 앞으로 확인해볼 주요 경쟁 모델보다 비교적 저렴하다.
 

파텍 필립 노틸러스(Patek Philippe Nautilus)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는 사업가의 마음으로 미래를 고민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오데마 피게보다 비싼 시계를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제네바의 경쟁 브랜드였던 파텍 필립뿐이었다. 제랄드 젠타는 1974년 자발적으로 파텍 필립을 위해 스테인리스스틸 스포츠 시계를 디자인했다. 당시 파텍 필립의 회장이던 헨리 스턴(Henri Stern)의 아들이자 현재 파텍 필립의 회장인 필립 스턴(Philippe Stern)은 제랄드 젠타와의 첫 만남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제랄드 젠타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 시계가 세기의 성공을 거둘 거라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정밀한 무브먼트. 파텍 필립은 2008년부터 칼리버 324 SC를 노틸러스에 탑재했다.


제랄드 젠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최종 디자인이 완성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한편 당시 필립 스턴에게 로열 오크와 유사한 디자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방해했던 건 다른 이유였다. 필립 스턴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계속 망설였습니다. 이 시계가 파텍 필립의 시계가 맞는지, 이렇게 크고 스포티한 스테인리스스틸 시계를 꼭 만들어야 하는 건지 끊임없이 되물었죠.“ 파텍 필립은 몇 차례나 디자인을 수정하고 여러 프로토타입을 개발한 끝에 1976년 바젤 시계 박람회에서 노틸러스(Ref.3700/1A)를 전시할 수 있었다. 당시 파텍 필립에는 얇은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없었기 때문에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와 마찬가지로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를 채용했다. 2년 전 오데마 피게가 그랬듯이 파텍 필립의 딜러들도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단순하고 거대한 스테인리스스틸 시계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독일에서 판매된 노틸러스의 가격(4250마르크)은 소형 자동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계 중 하나는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들었다. 다이빙을 하거나 공적인 자리 또는 파티에 참석할 때, 회사 임원들의 기를 죽이고 싶을 때 노틸러스가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처럼 특이하고 도발적인 광고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6년 파텍 필립이 출시한 노틸러스는 1998년 한 차례 변경을 거쳐 2006년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파텍 필립은 특허로 등록한 첫 번째 노틸러스의 케이스를 기술적인 이유로 수정해야 했다. 녹이 슨 스테인리스스틸 나사로 인해 시계를 분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파텍 필립은 시계를 수리할 때 스테인리스스틸 나사를 금으로 만든 나사로 교체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케이스 번호가 536400인 제품부터는 생산할 때부터 금으로 만든 나사를 사용했다.1980년에 론칭한 여성용 노틸러스는 인하우스 쿼츠 칼리버 E19를 탑재했다. 남성용 모델보다 훨씬 더 나은 데뷔전을 치른 여성용 모델은 골드, 스테인리스스틸, 스테인리스스틸과 골드 콤비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버전으로 출시됐다. 남성용 모델의 경우 1998년에 중간 크기의 스테인리스스틸 모델(Ref.3800/1)이 출시되면서 여성용 모델에 뒤처지지 않게 됐다. 이 모델은 홈이 파인 다이얼 대신 표면이 매끄러운 다이얼을 적용했고, 바 인덱스를 로만 인덱스로 변경했다. 


힌지를 사용한 노틸러스의 얇고 우아한 케이스.



2006년 탄생 30주년을 맞이한 노틸러스(Ref.5711/1A)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지름 40mm의 케이스로 새롭게 출시됐다. 그러면서도 12바(bar)의 압력을 견뎌내는 성능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 모델은 2008년부터 사용한 셀프와인딩 칼리버 324 SC를 탑재했는데,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백을 통해 무브먼트를 감상할 수 있다. 몇 년 전부터 불고 있는 노틸러스 열풍으로 인해 파텍 필립 딜러들은 대기 목록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고객은 인터넷을 통해 정식 가격보다 더 비싼 값에 시계를 구입하기도 한다.



바쉐론 콘스탄틴 오버시즈(Vacheron Constantin Overseas)

1996년 바쉐론 콘스탄틴의 제품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오버시즈의 역사는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시계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7년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의 뒤를 이어 등장한 222가 오버시즈의 시초다. 짧은 모델명은 브랜드 설립 222주년을 의미한다. 도안과 케이스 콘셉트를 담당한 젊은 독일인 디자이너 외르크 하이제크(Jörg Hysek)는 위대한 두 모델을 본보기로 삼았다. 케이스 중간 부분과 나사로 연결된 베젤은 선박의 둥근 창을 염두에 둔 것이다. 출시 후 10 년간 약 500점이 생산된 222는 후속 모델인 333과 피디아스(Phidias)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이 시계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리는 이유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1996년에야 비로소 오버시즈라는 새로운 시계가 탄생했다. 소매에 걸려 불편할 수도 있는 독특한 형태의 베젤은 바쉐론 콘스탄틴의 상징인 말테 크로스에서 영감을 얻었다. 16개의 나사로 밀폐한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는 15바의 압력까지 견딜 수 있다. 크라운 가드와 스크루 다운 크라운, 강화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 트리튬 코팅 처리한 인덱스와 핸즈는 럭셔리 스포츠 시계만의 특징이었다. 2005년 브랜드 창립 250 주년을 맞이한 바쉐론 콘스탄틴은 조심스럽게 오버시즈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센터 세컨드와 날짜창이 있는 새로운 오버시즈의 지름은 42mm로 늘어났고, 연철 내부 케이스로 둘러싼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889를 탑재했다.

 

1996년 출시된 바쉐론 콘스탄틴의 오버시즈는 2005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중요한 진화를 경험했다.


3개의 스트랩을 번갈아가며 착용할 수 있다. 악어가죽 또는 러버 스트랩은 폴딩 버클을 90°로 돌려 손쉽게 교체할 수 있다.


새롭게 태어난 3세대 오버시즈가 등장한 건 2016년이다. 케이스 중간 부분은 눈에 띄게 둥글고 부드러워졌다. 말테 크로스에서 고안한 베젤의 모서리를 8개에서 6개로 줄여 소매에 걸리는 불편함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특허 받은 스트랩 교체 시스템이다. 구매 시 스테인리스스틸 브레이슬릿과 러버 스트랩 그리고 악어가죽 스트랩이 함께 제공되며, 사용자 스스로 간단하게 교체할 수 있다. 손목이 부었을 때는 스테인리스스틸 브레이슬릿의 버클과 연결된 링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면 두 번에 걸쳐 4mm만큼 늘릴 수 있다. 악어가죽이나 러버 스트랩의 경우 폴딩 버클을 90°로 돌려서 간단히 교체할 수 있다. 스프링 바를 사용하는 일반 스트랩은 오버시즈에는 맞지 않는다. 자성으로부터 무브먼트를 보호하는 연철 내부 케이스는 그대로지만 무브먼트는 새롭게 바뀌었다. 시·분·초와 날짜 기능을 갖춘 기본 모델에 탑재한 셀프와인딩 칼리버 5100은 칼럼 휠 방식의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5200의 얇은 버전이다.

 

오버시즈의 전신인 222는 1977년 출시됐다.


셀프와인딩 칼리버 5100은 로저드뷔와 함께 개발했다.



바쉐론 콘스탄틴과 로저드뷔는 시계를 디자인하고 생산할 때 일부 부품을 공유한다. 로저드뷔가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칼리버 RD680이 이에 해당한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발레 드 주(Vallée de Joux)와 제네바에서 모든 무브먼트를 생산하고 조립한다. 제네바 실 인증을 받은 새로운 오버시즈가 경쟁이 치열한 럭셔리 시계 시장에서 앞으로 어떻게 버틸지는 두고 볼 일이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은 독일어권에서는 아시아에서처럼 인기가 많지 않다. 무엇보다 딜러들은 로열 오크가 아닌 노틸러스와 비슷한 오버시즈의 가격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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