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상 지속된 파텍 필립 핵심 수동 칼리버의 실력
앞장에서 설명한 부분들을 실례를 들어 확인하기 위해 수동 고급시계의 대표로 파텍 필립 Cal.215 PS를, 오토매틱 실용 시계의 대표로는 파네라이의 Cal.P.9000을 선택하여 각각의 칼리버를 탑재한 실제 시계의 정밀도 테스트와 착용 테스트를 실시했다. 이 파트의 목적은 정밀도 편에서 설명한 포인트를 확인하면서 그 결과를 고찰해보는 것이다.
파텍 필립
칼라트라바 Ref.5565
약 2년에 걸쳐 리모델링 후 2006년 11월에 재오픈한 파텍 필립 제네바 본점의 리모델링 기념 한정 모델이다.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로 지름 36mm의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는 착용감이 뛰어나다. 새틴과 헤어 라인 피니싱이 뚜렷한 조화를 이루는 투톤 실버 다이얼, 시인성이 좋은 입체적인 인덱스가 특징이다. 300개 한정 생산된 이 제품은 완판됐다.
<크로노스>는 파텍 필립의 칼리버 215 PS를 고급 모델의 대표로 선정, 오차측정기로 정밀도 테스트를 수행했다. 또 10일간에 걸친 착용 테스트를 실시했다. 이를 위해 선정된 것은 2006년 발표된 한정판 칼라트라바 5565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모델이다. 이 모델을 선정한 이유는 대여용 215 PS 탑재 모델이 이 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수배해 대여받은 개인 소장 모델이었고, 아직 한 번도 오버홀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을 밝혀둔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일 오차에 마이너스 경향이 보였지만, 정밀도는 훌륭했다. 여기서 ‘마이너스 경향이 보였는데, 어째서 정밀도가 훌륭하다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차는 플러스, 즉 빨라지는 경향이 바람직하다. 실제 사용할 때는 빨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느려질 경우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정밀도를 평가할 때 일오차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일교차다. 시계에서 일교차란 하루의 늦고 빠른 상황이 매일 어느 정도 분포하는 것인가에 대한, 그 분포의 정도를 말한다. 시계 이론의 석학 고마키 쇼이치로는 “정밀도가 높다는 의미는 (일오차) 분포가 적다는 의미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단, 이번 테스트에서는 일상적 사용에서의 일오차의 분포 성향을 보기 위해 10일간 착용한 후 일오차의 차이를 빼고 그 절대치를 간편하게 일교차로 했다(일교차는 브랜드마다 정의가 다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포지션, 온도, 태엽이 감긴 양을 동일 조건으로 맞춘 상태에서의 일오차 분포를 가리킨다). 착용 테스트 결과를 보면, 누적 오차와 일오차는 늦는 경향이 있지만 일교차는 1초 이내에 그친다. 평균 일교차는 0.78초/일로 그 분포는 분명 작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그랜드 세이코의 GS규격(편집자주: 세이코 자체 크로노미터 규격)에서는 평균 일교차가 1.8초/일 이하다.
일오차에 관해서도 10일간 착용 테스트에서는 -1초~-4초 이내에 그치며, 평균 일오차는 -2.7초/일, 오차측정기를 통한 정밀도 테스트에서 풀와인딩 시(T0)의 6포지션 오차 평균이 -4초/일, 24시간 후(T24)가 -1.5초/일, 36시간 후(T36)에도 -0.5초/일로 COSC 인증 크로노미터와 비교해도 그 인정기준인 평균 일오차 -4초~+6초/일 이내에 해당하는 수치다. 물론 측정 조건이나 제반 기준이 다르므로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를 위한 기준이라고 해도 나쁜 수치가 아님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오차의 최대 포지션차다. 정밀도 테스트 결과를 보면 태엽의 와인딩 잔량이 약 20%인 T36에서는 9초/일로 다소 크지만 T0와 T24에서는 2초/일과 4초/일로 상당히 작다. 최대 포지션차도 27도(T0), 31도(T24도), 25도(T36도)로 매우 좁은 범위에 그치고 있어 정밀도가 안정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정밀도의 안정성을 가져온 일등공신은 자이로맥스, 즉 프리스프렁일 것이다. 레귤레이터를 없앰으로써 레귤레이팅 핀이 헤어스프링의 자유로운 진동을 저해하는 일이 없고, 레귤레이팅 핀이 물리적으로 헤어스프링에 접촉할 일이 없으므로 헤어스프링의 손상 또한 피할 수 있다. 물론 레귤레이터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충격에 의해 레귤레이터가 어긋나 정밀도에 영향을 미칠 염려도 없다. 시간당 2만8,800번 진동하는 헤어스프링은 충분히 단단하므로 회전각도의 포지션 차를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프리스프렁의 약점으로는 움직임의 속도 조절 범위가 레귤레이터에 비해 작다는 것이지만, 이번 테스트 결과를 보면 초기 단계에 상당 수준 정밀함을 구현할 수 있으므로 그런 약점도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테스트가 증명한 높은 정밀도와 안정성. 그것은이 215 PS가 기본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전체적인 수치에서 보인 마이너스 경향은 밸런스에 달린 스크루로 조절할 수 있는 정도의 범위다. 또 자이로맥스 스크루는 밸런스 휠 위에 있어서 밸런스를 떼어내지 않고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215PS의 합리적인 콘셉트를 엿볼 수 있다.
Cal.215 PS
와인딩 타입 | 수동
진동수 | 28,800vph
구동각 | 54도
파워리저브 | 약 45시간
1974년에 개발된 Cal.215 PS는 현대적인 방식을 도입해 설계한 초기 핵심 수동 칼리버다. 레귤레이터를 없애고 스크루로 완급을 조절하는 자이로맥스와, 시간당 2만8,800번이라는 높은 진동수가 특징이었다. 이는 당시 여타 브랜드보다 앞선 수준의 칼리버였다. 현재 프리스프렁과 하이비트 방식을 탑재한 칼리버가 주류를 이루는 세태를 생각하자면, 무려 30년 이상 앞선 것으로 그 선견지명과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차측정기를 통한 정밀도 테스트 결과
일상적 사용을 통한 착용 테스트 결과
프리스프렁으로 인한 안정적인 작동
파네라이
루미노르 1950 서브머시블 47mm
2009년 발표된 높은 정밀도를 자랑하는 인하우스 오토매틱 칼리버 P.9000을 탑재했다. 새틴 피니싱과 폴리싱 처리된 케이스는 티타늄 합금이다. 스테인리스스틸과 비교해 손색없는 질감을 자랑한다. P.9000의 뛰어난 성능은 표가 보여주는 대로다. 매우 균형 잡힌 실용적인 모델로 착용감도 양호하다. 가격 1200만원대
필자는 예전에 파네라이의 자사 무브먼트 P.2002를 테스트한 적이 있다. 정밀도는 상당히 양호했고, 등시성도 우수했다. 롱 파워리저브 모델 중 베스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P.2002를 베이스 무브먼트로 해 2009년 발표한 것이 P.9000계 무브먼트다. 배럴 수를 줄여 매직레버 방식의 오토 와인딩 기구를 추가한 것 외에 설계는 P.2002계열과 거의 같다. 바꿔 생각하면 P.9000계열 또한 같은 성능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
테스트용으로 파네라이에서 대여한 것은 P.9000을 탑재한 루미노르 1950 서브머시블 47mm(Luminor Submersible 1950 3Days Automatic Bronze - 47mm)였다. 테스트는 12일간 이루어졌는데, 10일간 연속으로 착용 테스트한 후 2일간 벤치테스트를 거쳤다. 테스트 결과를 먼저 기술하고자 한다. 10일간의 누적 오차는 -15초, 1일 평균 일 오차는 -1.5초였다. 오차측정기를 통한 테스트 결과를 봐도 역시 늦는 경향을 보였다. 단, 정밀도는 매우 높아서 일교차가 적었다. 이런 경향은 P.2002계열과 거의 같은 것이다.
결과를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태엽을 완전히 다 감은 상태에서는 평평한 곳에 두었을 때 회전각도가 279도, 오차는 +3초를 기록했다. 그 외의 포지션에서는 회전각도가 거의 대부분 감소하고 오차도 그에 비례해 늦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측정기의 결과를 보면 평평한 곳에 두었을 때 회전 각도가 260도 전후일 때 오차는 ±0초로, 그것보다 회전각도가 높아지면 빨라졌고 떨어지면 늦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 결과를 이번 특집 항목에 맞게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P.9000계열의 이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높은 진동. 진동수가 높아질수록 등시성도 높아지며 포지션 간의 오차도 개선된다. 특히 포지션 간의 오차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진동수를 2배로 올리면 헤어스프링은 4배 단단히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곧 단단한 헤어스프링은 쉽게 변형되지 않으므로 포지션 간의 오차가 극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Cal.P.9000
와인딩 타입 | 오토매틱
진동수 | 28,800vph
구동각 | 50도
파워리저브 | 약 72시간
매직레버 방식의 양방향 오토매틱 로터를 채용. 트윈배럴로 롱 파워리저브를 실현했다. 밸런스는 다소 작지만 이스케이프먼트 주변의 가공 정밀도를 높이고, 프리스프렁을 채용함으로써 높은 정밀도를 구현할 수 있었다. 단, 실험에 사용된 모델의 경우 그렇게 조정된 탓인지 약간 느린 경향을 보였다.
오차측정기를 통한 정밀도 테스트 결과
일상적 사용을 통한 착용 테스트 결과
두 번째 장점은 프리스프렁이라는 것이다. 헤어스프링의 자유진동이 방해를 받게 되면 정밀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십상인데 특히 회전각도가 떨어질 경우라면 이는 더 심각해진다. 프리스프렁을 택하면 헤어스프링의 자유진동이 확보되어 회전각도에 관계없이 정밀도가 안정될 수 있다(물론 예외의 경우도 많다). 이번에 테스트한 P.9000도 프리스프렁을 채용한 결과, 260도라는 회전각도를 경계로 회전각도의 증대=빨라짐, 감소=늦어짐이라는 매우 안정된 동작을 보여주었다. 물론 P.9000계열의 설계에도 약점은 있다. 밸런스가 작고 회전각도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72시간의 파워리저브를 실현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파네라이는 이를 위해 밸런스를 작게 만들고 회전각도도 의도적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평평한 곳에서 최대 약 280도를 보이는 회전각도는 브라이틀링의 칼리버01과 동일하다. 의도적으로 회전각도를 낮추는 설계는 최신 칼리버의 공통된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테스트 모델의 동작을 볼 때, 파네라이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한 듯하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데 있어서 외부 요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회전각도도 하루 25도 정도 떨어졌을 뿐이다. ETA7750이 하루에 회전각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과 비교하면 기본 성능의 우수함이 확실하다. 테스트 기간 중 필자는 태엽이 풀 와인딩될 수 있도록 시계를 항상 손목에 차고 지냈다. 회전각도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P.9000은 놀라운 정밀도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정밀도가 마이너스 경향으로 치우친 것은 시계를 보관할 때 다이얼 쪽을 위로 해놓지 않았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자면, 오차는 좀 더 빠른 경향이었으면 싶다. 아마도 테스트 모델은 완전히 다 감긴 시점에서 높은 정밀도가 나오도록 세팅되어 있었던 것 같다. 매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빼어난 정밀도를 실감할 수 있을 테지만, 시계로서는 완전히 다 감긴 시점으로부터 24시간 후쯤 높은 정밀도를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쩌면이는 개체 차이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조정의 문제일 것이다. 고로 정밀도를 개선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시계는 케이스 피니싱도 양호하다. 사이즈가 47mm나 되지만, 케이스가 티타늄 합금이라 생각보다 가볍다. 그리고 러그가 길어 손목 착용감도 나쁘지 않아서 거의 매일 손목에 착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시계에서도 몇 가지 약점을 찾을 수 있다. 로터의 회전음은 ETA 2892A2를 떠오르게 하며, 시계 전체의 중심도 약간 높다. 무브먼트는 상당히 아름답지만 기계화된 프로세스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테스트를 마친 후의 소감은 이렇다. P.9000이 대량 생산 모델임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완성도도 아주 높다고 할 수 있다.
PART 1
페를라주 Perlage
쇼파드
L.U.C 1.96
우수한 페를라주의 예. 원의 중심에 다른 원이 겹쳐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페를라주의 극단적인 번짐이나 편차는 보이지 않는다. 회전하는 고무 소재의 숫돌을 가볍게 대고 깎아낸 찌꺼기를 정성껏 제거하면서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 워치메이커의 시계 중에는 더 뛰어난 페를라주가 새겨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량 생산품으로서는 쇼파드의 L.U.C 1.96이 최고다.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페를라주의 간격과 깊이
메인 플레이트에 새겨진 페를라주
작은 원을 포갠 장식 문양인 페를라주는 고급 시계에서는 익숙한 장식 기법이다. 그러나 페를라주의 유무가 종종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있어도, 그것의 좋고 나쁨이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페를라주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퀄리티의 문제다. 과연 무엇이 좋은 페를라주인가? 현재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제품 중 가장 우수한 피니싱을 선보이는 쇼파드와 랑게 운트 죄네를 예를 들어 요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랑게 운트 죄네
1815
쇼파드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완성도를 지닌 것이 랑게 운트 죄네의 페를라주다. 메인 플레이트에 단단한 저먼 실버를 사용했으며, 메인 플레이트에 고무 소재의 숫돌을 부드럽게 갖다 대고 페를라주를 새겼다. 결과적으로 랑게 운트 죄네의 페를라주는 여타 브랜드에서 흉내 낼 수 없는 뉘앙스를 가진다. 아쉽게도 이 제품에서는 밸런스 주변이나 이스케이프 휠 아래의 페를라주가 생략되었지만, 피니싱은 구형 1815보다 우수하다.
많은 애호가가 관심을 갖는 장식 기법으로 페를라주가 있다. 컴플리케이션과 마찬가지로 페를라주에도 좋고 나쁨은 존재한다. 그 기준은 크게 3가지다. 하나는 간격이 적절할 것. 그 다음은 마감에 있어서 번짐이나 편차가 없을 것. 마지막으로 부위에 따라 적절한 페를라주가 새겨졌는지를 살펴야 한다.
진정한 페를라주는 원의 중심에 그 다음 원의 바깥둘레가 겹친다. 즉, 반원이 겹쳐 있는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쇼파드나 랑게 운트 죄네의 페를라주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원은 완벽한 간격을 유지하며 겹쳐 있다. 이에 비해 ‘좋지 않은’ 페를라주는 간격이 고르지 못하다. 페를라주를 담당한 장인의 기량이 부족한 경우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비용 절감을 위해 의도적으로 간격을 넓게 잡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어쩌다 간격이 고르지 못한 페를라주를 목격한다면 대부분 장인의 테크닉이 부족하거나 비용 절감을 노린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예로는 티에리 나타프가 CEO로 재직하던 시절의 제니스, 새로운 매뉴팩처를 준공한 직후의 바쉐론 콘스탄틴을 들 수 있으며 후자의 예로는 다소 오래전의 파텍 필립을 들 수 있다.
마감이 고르지 못하다는 건 더 큰 문제다. 페를라주는 회전하는 고무 소재의 숫돌을 메인 플레이트에 대고 새기는 작업 방식을 통해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숫돌의 회전속도가 빨라 메인 플레이트에 강한 압력을 주게 되면 찌꺼기가 생기기 쉽다. 찌꺼기를 제거하지 않고 다음 페를라주를 새기면 숫돌에 찌꺼기가 달라붙어 표면에 깊은 흠집을 남긴다. 고르지 못하고 상처투성이인 페를라주는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양심적인 브랜드나 워치메이커는 고로 페를라주를 몇 번 새기고 난 후 반드시 숫돌을 청소한다. 그리고 찌꺼기가 가급적 발생하지 않도록 숫돌의 회전 속도를 낮춘다. 그런 과정을 겪은 페를라주는 편차나 번짐 없이 균일한 상태를 가진다. 사진의 쇼파드와 랑게 운트 죄네, 그리고 최근의 로저 드뷔가 양질의 페를라주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브랜드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찌꺼기 청소를 생략하고 숫돌의 회전율도 높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느 정도 가격대까지라면 그런 페를라주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으며, 페를라주 자체만으로도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고 환영할 수 있다. 그러나 100만 엔대(한화 약 2000만원대) 후반이면서도 낮은 퀄리티의 페를라주를 가진 시계가 해마다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수천만 엔
(수억원)짜리 시계에서조차 이런 수준의 페를라주를 발견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좋지 않은 페를라주를 새길 거라면 차라리 생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기는 부위에 따라 적절한 페를라주가 들어 있는지도 큰 문제다. 예전의 고급 시계들은 손이 닿기 힘든 부분까지 세밀하게 페를라주가 새겨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능한 한 이런 세밀한 페를라주를 피하려는 예가 많으며, 이를 통해 확실히 비용은 절감될 수 있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페를라주의 피니싱이 훌륭한 브랜드와 시계를 언급할까 한다. 어디까지나 빅 브랜드에 한정한 이야기지만 참고가 되길 바란다. 쇼파드의 일부 모델과 랑게 운트 죄네, 파르미지아니, 글라슈테 오리지날, 프랑수아 폴 주른, 로저 드뷔, 불가리의 제랄드 젠타와 다니엘 로스, 세이코의 하이엔드 모델, 시티즌의 기계식 시계를 들 수 있겠다.
확실히 페를라주는 장식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만큼 장인의 기량과 메이커의 비용에 대한 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부분도 없다. 편차나 번짐이 없는, 균일하게 잘 새겨진 페를라주를 지닌 시계라면 분명 피니싱 또한 기대치에 부합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브리지의 마감 Bridge Finish
ABC Point
잘 다듬은 에지와 측면 피니싱에도 기술은 집약되어 있다
페를라주와 마찬가지로 브리지 마감에도 우열은 있다. 다만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코트 드 제네바(편집자주: 줄무늬 패턴의 브리지 장식) 자체는 브랜드마다 큰 차이가 없다. 기본적으로 기계를 통해 작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리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오히려 그 단면과 측면일 것이다. 이런 요소는 시간과 수고, 비용을 들일수록 개선할 수 있는 문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살펴보자.
H. 모저 앤 씨
마유 마로네
H. 모저 앤 씨는 가격 거품 없이 그에 상응하는 최상의 품질을 갖춘 시계를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 그러나 에지와 측면 마감의 수준은 표준에 그친다. 브리지의 윗면에 헤어라인 가공을 한 후 에지를 다이아몬드 커터로 깎아내어 미러 피니시 처리했다. 이 기법 자체는 중급 모델에서 볼 수 있지만, 그대신 일체형 브리지를 주로 사용하는 중급 모델과 달리 마유 마로네는 분할형 브리지를 선보이고 있다.
예거 르쿨트르
그랑 리베르소 976
높은 정밀도를 자랑하는 칼리버 970계열의 무브먼트를 사용했지만 피니싱은 중급 모델의 수준. 에지와 측면에서 명확한 절삭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보이는 것보다 성능에 중점을 두었다는 생각이다. 스테인리스스틸
모델의 가격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피니싱이 적당하다고 볼 수 있지만 골드 케이스 모델이라면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든다.
오리스
ETA7750
피니싱이 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는 무브먼트의 예다. 절삭된 브리지에 도금만 되어 있는 상태다. 가격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단, 이런 수준이 용인되는 건 30만 엔(한화 약 500만원) 전후까지라고 본다. 그 이상 가격대의 모델이라면 에지를 다이아몬드 커터로 다듬어야 하고, 스리 핸즈에 100만엔(한화 약 2000만원)대 중반 이상 가격대라면 에지는 수작업으로 마감 처리되어야 한다.
오리스
윌리엄스 F1팀 크로노그래프
오리스답게 가격대비 성능이 우수한 모델이다. 무브먼트의 마감을 생략하는 대신 외장에 충실한 것은 이 가격대에서는 지극히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케이스의 질감은 상당히 좋다.
무브먼트 ETA칼리버 7750, 42시간 파워리저브
지름 45mm
케이스 스테인리스스틸
가격 290만원
크레도르
노드 에이치 Cal.7R08
수준 높은 피니싱을 보여주고 있다. 곡면으로 구성된 폭넓은 에지는 완전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것. 단면을 줄을 이용해 3면으로 정리한 후 다이아몬드 페이스트 등으로 둥글게 마감 처리한다. 홀스톤 주위의 깊게 파인 에지도 역시 수작업을 해야만 가능한 부분. 에지가 둥글고 넓으며 크게 파여 있다면 그 마감은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브리지는 저먼 실버 소재.
쇼파드
L.U.C 1.96
가격대비 피니싱이 훌륭한 것이 쇼파드의 칼리버 L.U.C 1.96이다. 브리지의 에지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으며 폭도 넓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은 에지를 좁게 만들고 측면 폭을 넓히지만 쇼파드는 가능한 한 에지를 넓게 잡았다. L.U.C의 엔트리 모델인 경우 에지 부분에 다이아몬드 커팅이 되어 있다.
랑게 운트 죄네
1815
우수한 피니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랑게 운트 죄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브리지의 에지와 측면 마감이 뛰어나다. 흥미로운 점은 이스케이프 휠의 위치에 덧씌운 금속 플레이트다. 브리지를 따라 에지를 다듬었는데 브리지의 수가 적은 만큼 공을 들여 마감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파텍 필립
Cal.215 PS
비교적 양호한 피니싱의 예. 곡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폭넓은 에지가 고급 모델의 조건에 부합한다. 브리지와 메인 플레이트가 완벽하게 맞물려 파텍 필립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에지 윗면이 약간 거칠고 곡면에도 다소 편차가 보인다. 그렇지만 가격을 감안하면 충분한 수준의 피니싱이다.
무브먼트의 미관을 크게 좌우하는 것이 브리지 마감이다. 따라서 코트 드 제네바 문양으로 처리돼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브리지의 측면과 에지의 마감이다. 수고를 들인 만큼 피니싱 퀄리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브리지 마감을 좋은 것부터 예를 들어 순서대로 나열할까 한다. 일단 고급 모델의 대다수는 측면과 에지를 대강 성형하고 난 후 윗면을 마감한 후 다시 측면과 에지를 마감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스리 핸즈의 골드 소재, 150만 엔(2000만원) 이상의 시계라면 대부분 그렇다. 그러나 같은 기법이라고 해도 비용을 얼마나 어떻게 들였느냐에 따라 마감은 분명 달라진다. 포인트는 2가지다. 브리지의 에지가 둥글게 처리되고 형상이 복잡할수록 고급이며, 굴곡 없이 평평하고 간결할수록 저렴하다.
앞서 언급했던 모델 중 가장 우수한 것은 크레도르 노드 에이치다. 이 제품은 에지를 줄로 갈아 3면으로 만든 후 다이아몬드 페이스트 등을 이용해 단면을 미러 피니시 처리했다. 완전한 수작업이 아니면 이처럼 폭넓고 둥그스름하게 다듬은 에지를 만들 수 없다. 특히 홀스톤을 둘러싸듯 깊게 파인 에지는 왕년의 최상급 시계에서만 볼 수 있던 뛰어난 디테일이다. 약간 애매한 부분도 보이나 전체적인 완성도는 극소수의 뛰어난 독립 워치메이커의 작품과도 견줄 수 있을 듯하다.
그 다음으로 뛰어난 것이 쇼파드의 L.U.C 1.96이다. 마감의 전체적 퀄리티는 랑게 운트 죄네에 미치지 못하지만 에지의 형상이 복잡하고 그 폭도 넓다. 물론 에지 자체의 곡면도 살아 있다. 심플해 보이지만 비용을 들인 마감이다. 이어서 랑게 운트 죄네를 보자. 브리지와 메인 플레이트에 단단한 저먼 실버를 사용했다는 점 때문에 미러 피니시 측면에서 쇼파드보다 우수하다. 단 브리지의 수가 적어서 마감공정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에지의 형상을 보면 가급적 손이 많이 가는 예각을 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감 자체는 매우 양호하다.
그 다음은 파텍 필립이다. 에지의 폭이 넓은 데다 측면도 아름답다. 에지의 예각도 잘 서 있다. 그렇지만 피니싱 프로세스를 간소화해서인지 에지를 마감한 후 코트 드 제네바 처리에 들어간 것 같다. 그래서 에지를 자세히 보면 코트 드 제네바와의 단차가 보인다. 어쨌거나 이 정도까지가 고급 모델의 마감에 포함된다.
이제 중견 모델의 마감을 살펴보자. H. 모저 앤 씨는 양심적인 시계 제작을 하는 업체지만 에지 마감은 표준 수준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브리지 윗면을 마감 처리한 후 에지를 다이아몬드로 깎아냈다. 그래서 아름답게 미러링은 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곡면이 살아 있지 않고 완전한 평면이다. 곧 수작업이 아니라 기계로 연마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브리지를 일체화하면 에지의 마감은 더 간단해진다. 발 플뢰리에(Val Fleurier)의 무브먼트가 그런 경우다.
이어서 예거 르쿨트르. 에지와 측면에는 거의 마감이 되어 있지 않으며, 바이트(편집주: 금속을 자르거나 깎을 때 선반 등의 공작기계에 붙여 쓰는 날이 있는 공구)로 다듬었다. 가공은 매우 정밀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피니싱이 없다. 예거 르쿨트르는 다이아몬드 커트 피니싱을 기피하는 브랜드지만, 최소한의 피니싱 처리는 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전혀 마감되어 있지 않은 예를 들어볼까 한다. 오리스에 탑재된 ETA7750을 보자.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브리지의 위, 측면 모두 피니싱 처리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엔트리 모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당하다는 생각은 든다. 무브먼트에 들일 비용을 외장 쪽으로 돌린 점이 오히려 호감이 간다.
브리지 마감에 관해서는 여기까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코트 드 제네바의 유무가 아닌 측면과 에지의 마감 처리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의 여부다.
PART 3
브리지의 분할 방식 Divided Method of Bridge
파텍 필립
제네바 양식
1974년에 발매된 Cal.215 PS는 근대적인 구조의 걸작 수동 칼리버다. 지름은 21.9mm, 두께는 불과 2.55mm다. 대표적인 제네바 양식이지만 견고함을 더하기 위해 브리지가 완전히 독립된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ABC Point
브리지는 지역별로 다른 양식을 보인다
시계의 좋고 나쁨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브리지의 분할 방식은 분명 흥미로운 부분이다. 브리지 분할 방식은 한마디로 시계의 ‘원산지 증명서’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프랑스 타입, 또 다른 하나는 영국 타입이다. 전자는 브리지가 분할되어 있고, 후자는 일체형의 브리지를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H. 모저 앤 씨
주 양식
이스케이프 휠 이외의 기어 트레인을 한 장의 브리지가 담당하는 것이 전형적인 주 양식. 이 무브먼트에서는 배럴과 2번, 3번, 4번 휠이 하나의 브리지에 속해 있다. 3번 휠과 4번 휠 부분이 바깥쪽으로 뻗어 나와 있는 것도 역시 주 양식의 특징. 예거 르쿨트르가 예전에 즐겨 사용한 스타일이다.
노모스
글라스휘테 양식(3/4 플레이트)
ETA 푸조 7001의 기어트레인을 개량한 무브먼트지만 밸런스와 태엽, 루비 이외의 대부분 부품은 자사의 것을 쓴다. 브리지를 일체형으로 바꾸고 래칫 휠의 역회전을 방지하는 글라스휘테 스타일의 클릭도 볼 수 있다. 밸런스 콕 이외의 브리지를 일체화하는 스타일은 영국에서 처음 생겨났지만, 19세기 이후 독일 시계의 상징적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IWC Cal.65
핑거 타입
1910년대의 회중시계 무브먼트. 전형적인 ‘핑거 타입’이다. 2번 및 3번, 4번 휠, 이스케이프 휠을 각각의 독립된 직선형 브리지로 지탱한다. 19세기의 스위스 시계산업은 바쉐론 콘스탄틴이든 예거 르쿨트르든 모두 이 형태를 지닌 에보슈를 기반으로해 대량 생산됐다.
IWC Cal.95
제네바 양식
제네바 양식의 회중시계 무브먼트다. 설계자는 제네바 시계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로지에르 푸조라. 2번 휠과 3번 휠을 고정하는 브리지가 크게 완만한 곡면을 이룬다. 이 양식은 19세기 후반 이후 시계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 유래한 분할 브리지. 그 역사는 18세기의 시계 제작자 장 앙투안 레피네(Jean Antoine Lepine, 1720~1814)로부터 비롯됐다. 레피네는 1770년경, 통칭 ‘레피네 칼리버’를 개발해냈는데 당시 일반적이던 체인 퓨즈(chain fusee)와 기어트레인을 2장의 플레이트 사이에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닌, 메인 플레이트 위에 배럴과 기어트레인을 두고 그 위에서 브리지로 고정하는 형태였다. 또 작은 실린더 이스케이프먼트를 탑재했는데 그 영향으로 이후 시계는 얇고 실용적인 형태를 가지게 됐다.
레피네가 고안한 이 형태는 곧 프랑스 출신 워치메이커들에 의해 스위스의 프랑스어권 지역에까지 유입된다. 그리고 이 지역 시계의 고유한 외형적 특성이 됐다. 이른바 핑거 타입 브리지(IWC 칼리버65 참조)의 시작이었다. 핑거 타입 브리지는 스위스 내에서도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달라졌다. 핑거 타입을 가장 세련되게 다듬은 이들은 제네바의 워치메이커였다. 19세기 후반 이들은 핑거 타입 브리지에 큰 곡면을 가미해 독특한 양식을 완성해냈다. 단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는 아마도 IWC의 칼리버 95일 것이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제품 중 제네바 양식의 무브먼트로는 파텍 필립의 칼리버 215PS가 있다.
발레 드 주의 메이커들도 레피네 스타일에 자신들만의 개성을 가미했다. 그들은 분할된 브리지는 그대로 둔 채 2번과 3번, 4번 휠을 한곳에 모았다. 본래 이유는 아마도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다양한 브랜드에서 이러한 브리지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특히 르 상티에의 예거 르쿨트르가 이를 즐겨 사용했다. 과거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450계열이나 1990년대 수동 칼리버 822 등에서 이런 전형적인 ‘주 양식’을 볼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제품에서도 주 양식이 남아 있는 무브먼트는 상당수 존재한다. H. 모저앤 씨와 오데마 피게의 칼리버 3090이 그렇다. 르 브라슈(편집자주: 발레 드 주 지방에 위치함)에서 대대로 명맥을 이어온 기업인 오데마 피게는 그럴 만하지만, 독일어권에서 탄생한 브랜드인 H. 모저 앤 씨가 왜 하필 주 양식을 택했는가? H. 모저 앤 씨의 CEO 유르겐 R. 랑게는 이에 대해 “19세기의 H. 모저 앤 씨에서는 발레 드 주의 에보슈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이유를 설명한다.
지속적으로 일체형 브리지를 채용해온 나라는 영국이었다. 일체형 브리지 스타일은 시계에 체인 퓨즈가 장착됐던 시절부터 시작되어 단독 배럴이 보급된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 영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 독일이었다. 독일의 시계가 어째서 영국 스타일을 따른 것인지는 이유가 확실치 않다. 다만 당시 독일 제품 대부분이 영국의 것을 모방했음은 사실이다(심지어 독일산 패브릭에 영국산이라는 태그를 붙여 수출할 정도였다). 또 견고한 일체형 브리지가 독일인의 성격과도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일체형 브리지는 독일 시계(=독일어권 시계)의 공통된 특징이 됐다. 가장 유명한 것이 글라스휘테 양식이다. 현재도 랑게 운트 죄네나 노모스, 글라슈테 오리지날이 이 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시중의 제품에서 일체형 브리지(발 플뢰리에(Val Fleurier)의 특징이기도 하다)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됐지만, 이것은 영국이나 독일 양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단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체형 브리지를 채용했을 뿐, 한마디로 국적이 없는 것이다. 확실히 브리지를 일체화하면 무브먼트가 견고해지는 데다 생산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더불어 복잡한 곡면이 없는 브리지는 에지를 기계로 다듬을 수 있다. 물론 이런 무브먼트의 대다수는 설계 면에서는 우수하다. 그러나 그 지역 고유의 양식과 미학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브리지의 분할 방식 Divided Method of Bridge
H. 모저 앤 씨
올리베+미 글라스
현재 가장 홀스톤이 아름다운 시계 중 하나가 H. 모저 앤 씨다. 이 시계는 배럴 축에 사용된 홀스톤의 크기가 클 뿐 아니라 윗면이 돔 형상으로 미 글라스 가공 처리되어 있다. 색도 선명한 피전 블러드임을 알 수 있다. 색상이 선명한 루비를 사용하면 부품의 오일 상태를 확인하기가 좋다. 홀스톤 아래쪽에 보이는 것은 배럴 축이다.
ABC Point
눈여겨볼 것은 색과 모양이다
어떤 기준에서 좋은 품질의 시계나 고급 시계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대답을 할 테지만,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일단 무브먼트의 디테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면은 기준으로 디테일의 좋고 나쁨을 판단해야 할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홀스톤의 색과 모양이다.
예거 르쿨트르
플랫 스톤
잘 만든 플랫 스톤이다. 왼쪽은 3번 휠의 홀스톤, 오른쪽이 4번 휠의 홀스톤이다. 홀스톤 윗면은 완전히 평평하지만, 오일 싱크는 비교적 크게 만드는 것이 예거 르쿨트르의 특징이다. 현재 예거 르쿨트르가 사용하고 있는 홀스톤은 색상이나 형상이 지극히 표준형이다.
오리스
플랫 스톤
ETA7750 등의 에보슈에 사용되는 전형적인 홀스톤이다. 위쪽이 완전한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오일 싱크도 좁다. 이것으로는 홀스톤을 통해 휠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에서는 홀스톤의 색상이 어두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옅은 핑크색에 가깝다.
우리는 앞서 무브먼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고, 피니싱 상태와 장식 기법 등을 판별하는 법을 알아봤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남아 있다. 바로 홀스톤. 지금은 덜하지만 과거에는 고급 시계와 그렇지 않은 시계의 결정적 디테일의 차이를 홀스톤에서 찾을 수 있었다. 홀스톤의 색과 형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90년경 오데마 피게 자료를 인용하자면 이렇다. 그 시절 오데마 피게는 시계의 품질을 4등급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이를 위한 하나의 기준으로 홀스톤을 들고 있다. 등급을 위로부터 살펴보면 컴플리케이션 워치에 해당하는 ‘엑스트라(최상급)’의 홀스톤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균형 잡힌 크기, 짙은 붉은색이 바람직하다. 올리브 홀의 홀스톤은 신중하게 마찰 고정되어 있고, 엔드 스톤은 정성껏 광택을 낸 후 조립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등급이 한 단계 아래인 Ⅰ로 내려가면 홀스톤이 ‘고품질이지만 엑스트라의 것에 비해 붉은색이 연하다’라고 규정하며, Ⅱ 등급은 ‘양질’, 등급 Ⅲ에서는 ‘양질이지만 조립되는 수가 적다’라고 되어 있다.
오데마 피게의 엑스트라 등급에서 사용한 홀스톤의 ‘짙은 붉은색’이란 피전 블러드(pigeon blood) 즉 자적색의 홀스톤을 말한다. Ⅰ등급은 붉은색, 그 이하는 핑크빛을 띤 붉은색의 홀스톤을 사용한다. 엑스트라와 Ⅰ등급은 ‘올리베’와 ‘미 글라스’라는 마감이 되어 있다. 지금도 이 분류는 유효한 것이다. 홀스톤의 색이 짙고 모양이 복잡할수록 고급 모델이며 색이 핑크에 가깝고 모양이 심플할수록 중급이나 그 이하의 모델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재 시계에 사용되는 인조루비는 대부분 베르누이 공정(Verneuil process)으로 만든다. 알루미늄과 크롬 분말을 섞어 2,000도에서 가열해 단단히 굳힌 것이다. 그러나 베르누이 공정으로 생성된 인조루비는 공기기포 때문에 색이 옅어진다. 홀스톤의 대부분이 핑크색으로 보이는 것은 여기서 기인한다. 반면 피전 블러드 홀스톤은 대부분이 베르누이 공정 이외의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고로 공기 등이 혼합될 가능성이 낮으므로 순도가 높고 선명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모든 인조루비는 넓은 의미에서 단결정(편집자주: 전체가 고르고 규칙적으로 연결된 격자(格子) 구조를 가진 결정)에 속한다. 또한 적색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베이스가 되는 소재인 산화 알루미늄에 1%(최대치임)의 크롬을 섞으면 좋지만 그것만으로 색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그만큼 공정을 하는 방법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최근 단결정의 루비를 사용했음을 강조하는 브랜드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그들은 홀스톤으로 사용한 인조루비가 베르누이 공정 이외의 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인조루비는 홀스톤으로 가공된다. 우선 덩어리를 자르고 레이저로 구멍을 뚫은 후에 다이아몬드 파우더를 바른 실을 이용해 그 구멍을 넓힌다. 마지막은 오일 싱크(편집자 주: 홀스톤에 주유한 오일을 유지할 수 있도록 파인 부분)를 깎아 완성한다. 하지만 고급 시계에는 홀스톤을 위해 또 다른 공정이 추가 된다. 그 하나는 홀의 측면을 둥글게 마감하는 올리베 가공이다. 올리베 가공을 통해 축과 홀스톤의 접촉 면적이 감소하므로 회전각도가 개선된다. 고급 무브먼트는 거의 예외가 없다. 좀 더 뛰어난 경우는 홀스톤의 윗면이 돔 형상으로 가공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 글라스 가공이다. H. 모저 앤 씨의 홀스톤은 미 글라스의 좋은 예다. 기능적인 의미는 없지만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때문에 랑게 운트 죄네, 오데마피게, 파텍 필립, 쇼파드 등 일부 고급 시계 브랜드는 이런 형태의 홀스톤을 사용하고 있다. 단, 올리베든 미 글라스든 부차적인 가공을 하면 할수록 오일 싱크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H. 모저 앤 씨는 “1,000개 중에서 절반의 홀스톤은 파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인조루비의 발색을 좋게 하기 위해 베르누이 공정이외의 방법을 선택하면 홀스톤 제조 비용 자체가 대량 생산품의 제조 단가와 단위 자체가 다른 고가의 것이 된다. 따라서 색이 좋고 모양이 좋은 홀스톤이 쓰인 무브먼트를 봤을 때, 고급 모델이라고 확신해도 될 만한 근거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홀스톤의 장식성과 기능성
플랫 스톤
올리베
올리베+미 글라스
올리베의 실제
베젤의 기원과 현대적 의의
일부 고급 시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홀스톤 주변을 별도의 금속으로 덧씌운 ‘베젤(편집자주: 샤통. 특히 랑게 운트 죄네는 골드 샤통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랑게 운트 죄네는 각각의 베젤을 나사로 고정하는 19세기 기법을 채용하고 있다. 이제는 장식 기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베젤은 홀스톤을 쉽게 고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전에는 홀스톤의 가공 정밀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스톤의 가공이 정교해진 지금 베젤의 역할은 불필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랑게 운트 죄네가 여전히 이를 사용하는 것은 돔 형태로 마감 처리한 홀스톤이 베젤에 비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리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효과를 노린 케이스로는 세이코의 크레도르 노드 에이치를 들 수 있다. 홀스톤 주위를 역돔형으로 가공해 입체감을 부여했다. 즉 현재의 베젤은 입체감을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랑게 운트 죄네
나사 고정식 골드 샤통
크레도르
홀스톤 주위를 역돔형으로 마감 처리한 경우
컴플리케이션 워치 Complication Watch
기계로 가공할 수 있는 코트 드 제네바 대신, 수작업 실력이 그 미적 수준을 크게 좌우하는 페를라주를 택해 로터와 브리지 전체에 가공했다는 점에서 르 상티에 공방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다. 균일한 간격으로 흐트러짐이나 번짐 없이 새겨진 부드러운 인상의 페를라주는 작업자의 뛰어난 기술력과 더불어 진지한 작업 자세를 입증하는 결과물이다.
ABC Point
메인 플레이트, 브리지, 기능성 부품의 피니싱에 주목하라
이제까지 무브먼트의 피니싱 처리와 장식에 관해 각 테마별로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를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파트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모델을 예로 들어 그 마감과 장식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불가리 제럴드 젠타 옥토 콰드리-레트로
제럴드 젠타의 특기인 점핑 아워와 4개의 레트로그레이드가 탑재된 프티 컴플리케이션 워치. 가운데에는 분침과 크로노그래프, 3시 방향에는 30분 인디케이터, 9시 방향에는 12시간 인디케이터, 6시 방향에는 레트로그레이드 날짜창이 위치해 있다.
무브먼트 오토매틱 칼리버 GG7800, 45스톤, 21,600vph, 38시간 파워리저브
지름 54mm
케이스 18K 핑크골드
가격 8000만원대
브리지의 에지는 면을 만들어 폴리시 가공 처리되었다. 특히 로터를 지탱하는 브리지의 에지는 넓은 범위로 다듬은 곡면이 두드러진다. 처음에 줄로 각을 없애고 연마재를 이용해 정성스레 다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곡선미가 살아 있는 브리지의 형상은 수작업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응용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심플한 모델이 아닌 컴플리케이션 워치 몇 가지를 놓고 살펴보도록 하자. 그 대상은 불가리의 하이엔드 모델로 불가리에 통합된 제랄드 젠타와 다니엘 로스의 옛 공방에서 제조되는 시계이다. 예전에 공방을 취재했을 당시, 담당자를 통해 공방에서 제조되는 시계가 제랄드 젠타와 다니엘 로스가 재직했을 당시와 같은 방법으로 피니싱 처리되고 있음을 확인했었다. 불가리의 하이엔드 모델을 예로 들고자 한데는 피니싱에 있어서 뛰어난 안목을 가졌던 제랄드 젠타와 다니엘 로스, 그들이 키워낸 공방에서 제작된 시계였기 때문이다.
불가리 제랄드 젠타 옥토 콰드리 레트로(Gerald Genta Octo Quadri-Retro)를 보면 불가리 하이엔드 모델 특유의 피니싱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브먼트의 로터와 브리지 전면에는 빈틈없이 페를라주 장식이 되어 있다. 앞선 파트에서 언급한 페를라주 장식의 좋은 예를 이미 읽었다면 이것이 매우 섬세하고 완벽한 간격으로 세공되었음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의 깊이도 일정한 데다 흐트러지거나 번진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페를라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흠집이 보이지 않는 것은 세공 시 발생하는 이물질을 장인이 수시로 제거하면서 섬세하게 작업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무숫돌의 회전 속도나 누르는 강도는 적당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페를라주가 탄생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코트 드 제네바보다 페를라주의 피니싱이 제조비용 면에서는 훨씬 높다. 코트드 제네바 패턴은 어떤 브랜드에서건 대부분 기계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페를라주 역시 그저 숫돌을 회전시켜 무브먼트에 대고 누르는 것에 불과하므로, 최근에는 공정을 완전히 자동화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자동화된 작업으로도 어느 정도의 세공은 가능하지만 수작업이 없는 만큼 디테일이 확실히 살지 않으므로 고급 모델에는 어울리지 않는 ‘보통’ 수준의 결과물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피니싱을 위해 숫돌의 회전 속도를 낮추는 브랜드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기계로 진행되는 작업시간은 장인의 수작업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은 것이다. 제랄드 젠타 옥토 콰드리 레트로는 코트 드 제네바 대신 페를라주를 수작업으로 새기며 그것이야말로 제랄드젠타 공방의 자존심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더 하이엔드급에 속하는 모델이라면 보다 탁월한 수준의 피니싱 처리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매그소닉(Magsonic)’이 그렇다. 투르비용과 그랑소너리를 탑재한 이 모델은 메인 플레이트를 봐도 피니싱 수준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이얼 쪽에 놓이는 소너리 컴플리케이션을 케이스 뒷면으로 옮겨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케이스의 뒷면은 그 자체로 압권이다. 소너리 컴플리케이션 사이사이로 들여다보이는 페를라주와 스틸 부품의 조형과 피니싱 상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이 무브먼트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스프링의 가늘기다. 스프링과 같은 부품은 어느 브랜드에서건 모두 방전가공기로 가공한다. 그래서 열로 인해 휠 것을 감안해 스프링을 두껍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불가리는 가능한 한 스프링을 가늘게 깎아낸 모습이다. 이 정도로 가는 스프링을 많이 사용한 컴플리케이션 워치는 드물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전에 제랄드 젠타가 탑재했던 퍼페추얼 캘린더는 조형미 측면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다. 제랄드 젠타는 스틸 부품의 조형에 입체감을 주기 위해 가능한 한 스프링이나 암을 가늘게 만들었다.
본래는 다이얼 쪽에 배치되는 그랑 앤 프티소너리 컴플리케이션을 케이스 뒷면에 배치해 메인 플레이트에 새겨진 페를라주는 부품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놀라울 정도로 가늘게 깎은 스프링과 복잡하게 조립된 기능성 스틸 부품들의 정교한 조형미, 깔끔한 수준의 피니싱을 만끽할 수 있다.
불가리
제럴드 젠타 매그소닉
투르비용, 그랑 앤 프티소너리, 미니트 리피터를 탑재했다. 4개의 해머가 연주하는 웨스트민스터 차임의 음색을 최대치로 높일 수 있도록 합금 ‘매그소닉’을 미들케이스로 택했다.
무브먼트 수동 칼리버 GG 31001. 55 스톤, 21,600vph, 48시간 파워리저브
지름 51mm
케이스 매그소닉, 18K 핑크골드
가격 12억대(주문 생산)
크로노그래프를 담당하는 작동 레버나 중앙에 배치된 스플릿 세컨드 기구를 제어하는 레버류 등의 스틸 부품에도 폴리싱 처리가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섬세한 헤어라인이 새겨 있다. 정밀한 부품을 자사 공방에서 제조하는 데다 그것을 뛰어난 기술로 피니싱 처리할 수 있는 장인이 있기에 가능한 수준의 시계다. 세부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조형미가 돋보인다.
불가리
다니엘 로스 투르비용 라트라팡
11시 방향에 투르비용 캐이지를 갖춘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가운데 크로노그래프 초침, 3시 방향에 30분 인디케이터, 7시 방향에 아워 앤 미니트 인디케이터를 배치했다.
무브먼트 수동 칼리버 DR 8300, 38 스톤, 21,600vph, 48시간 파워리저브
사이즈 43mm×46mm
케이스 18K 핑크골드
가격 2억4000천만원대(주문생산)
결과적으로 이 퍼페추얼 캘린더는 1980년대의 시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섬세함과 입체감을 가지게 됐다. 제랄드 젠타가 공방을 떠났지만 그 조형미는 이전과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스프링의 가늘기를 보면 그 피니싱의 정교함에 감탄하게 된다. 만일 스프링을 두껍게 깎아낸다면 측면의 미러 피니싱 처리와 그 윗면의 헤어 라인을 새기는 작업 또한 손쉬울 것이다. ETA7750의 두꺼운 스프링이라면 생초보라도 나름대로 피니싱 처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그소닉은 손가락으로 누르기만 해도 변형될 정도로 가느다란 스프링을 사용하고 있다. 웬만한 실력을 가진 워치메이커가 아니라면 이 정도 수준의 피니싱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불가리 다니엘 로스 투르비용 라트라팡도 스틸 부품의 피니싱에 그 특별함이 있다. 요즘 대부분의 브랜드에서는 헤어라인을 깊게 새기려는 경향이 있다. 깊이 새겨진 헤어라인이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실상은 이렇다. 완벽한 면을 가진 스틸 부품이 아니면 헤어라인을 얕게 새겼을 때 일정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되므로 깊게 새기려 하는 것이다. 지극히 얕게 새겨진 불가리의 헤어라인에서 스틸 부품이 얼마나 평면으로 매끄럽게 잘 다듬어졌는지 또 장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읽어낼 수 있으며, 자신감마저 느낄 수 있다. 아쉽게도 나사의 피니싱 수준은 약간 부족하지만 머지않아 개선될 것으로 본다.
물론 피니싱 처리가 뛰어난 만큼 불가리의 하이엔드 모델의 가격은 확실히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일정한 형태의 깔끔한 페를라주와 스틸 부품에 얕게 새겨진 헤어라인, 다이아몬드 커터로 깎아내어 마감하지 않은 브리지의 에지 등 피니싱에 있어서만큼은 최고 수준이다. 이것을 고급 모델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고급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까?
Originally appeared in Chronos Japan
게재호
15호(2011년 07/08월)
글
히로타 마사유키(Masayuki Hirota,
Editor
크로노스 편집부
사진
오쿠야마 에이치, 오쿠다 다카후미, 요시에 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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