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식 시계 르네상스는 밸주 7750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위상을 높였다. 이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독일 시계 브랜드 진은 많은 시계에 밸주 7750을 장착했다.
이 베스트셀러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크로노미터 표준에 맞춰 조정하기 쉽고 다양한 방식으로 장식할 수 있다.
1973년 무브먼트 제조사 밸주 S.A.가 새로운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뒤늦은 행보였다.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만들기 위한 경쟁은 1960년대에 이미 본격화했고, 1969년에 스톱 기능을 갖춘 3개의 셀프와인딩 칼리버가 출시되었다. 브라이틀링, 해밀턴-뷔렌, 호이어와 뒤부아 데프라는 크로노매틱이라는 무브먼트를, 제니스-모바도는 엘 프리메로, 세이코는 칼리버 6139를 선보였다. 밸주는 혁신의 물결 속에서 시급히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저렴한 일본산 쿼츠 칼리버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밸주는 더 이상 시장 점유율을 잃고 싶지 않았다.
IWC의 워치 메이커 리차드 하브링은 IWC를 위한 밸주 7750에 스플릿 세컨즈 기능을 추가했다.
차세대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밸주 7750의 개발은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
초기 상황
1970년 밸주에 이제 막 합류한 에드먼드 캅트(Edmond Capt)는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야심 가득한 밸주는 새로운 무브먼트가 완벽하기를 바랐다.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을 것, 스톱 기능 외에 날짜와 요일 디스플레이까지 탑재할 것, 생산 비용이 저렴할 것, 최대한 빠르게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 다양한 주문 사항에 막막했던 캅트는 숙련된 시계 제작자 도널드 로샤(Donald Rochat)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일단 빠르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핸드와인딩 무브먼트인 밸주 7733을 기반으로 개발에 착수했으며, 이례적으로 무브먼트 설계에 컴퓨터를 사용했다.
밸주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캅트와 로샤는 크로노그래프를 위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밸주 7750에는 칼럼 휠을 대신하는 길쭉한 캠 시스템으로 크로노그래프 기능을 제어했다. 캠 방식 덕분에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고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덕분에 밸주는 잠시나마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아시아의 저렴한 쿼츠 시계가 유럽 시장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계식 시계와 무브먼트에 대한 수요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불과 출시 2년 만에 밸주 7750은 완전히 단종되었다. 스위스 이사회에서는 이것을 한 시대의 종말로 간주했다. 에드먼드 캅트는 밸주 7750 프로젝트와 관련한 모든 것을 폐기하라는 사측의 체념 섞인 지시를 받았다.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에드먼드 캅트 덕분에 밸주는 1980년대 초 밸주 7750 무브먼트를 되살릴 수 있었다.
밸주 7750 무브먼트를 개발한 주역인 에드먼트 캅트.
기계식 메커니즘 르네상스
캅트는 엘 프리메로 칼리버를 만든 제니스 워치 메이커 샤를 베르모(Charles Vermot)의 행보를 따랐다. 지시대로 자료를 버리지 않고, 무브먼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도면과 도구를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 1980년대 초반 쿼츠 시계가 범람하자, 운명처럼 기계식 시계가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쿼츠 시계는 정확성과 가격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쟁력을 갖췄지만, 기계식 시계는 독창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무브먼트 제조업체에는 새로운 기회였다.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에드먼드 캅트 덕분에 밸주는 1980년대 초 밸주 7750 생산을 재개했다. 많은 시계 브랜드가 새로운 기계식 시계에 사용할 셀프와인딩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찾고 있던 차에 비옥한 땅을 거저 얻은 것과 다름없는 기회였다.
1979년 브라이틀링을 인수한 어니스트 슈나이더(Ernest Schneider)는 밸주의 초기 고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84년 브라이틀링 100주년 기념 모델로, 1940년 브라이틀링 크로노그래프의 새 에디션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크로노맷(Chronomat). 브라이틀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강력한 디자인을 지녔지만, 밸주 7750을 탑재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공 스토리는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IWC도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호응했다. 당시 CEO 귄터 블륌라인(Günter Blümlein)은 기술 디렉터 커트 클라우스(Kurt Klaus)에게 크로노그래프를 장착한 퍼페추얼 캘린더를 개발해달라고 요청했다. 밸주 7750을 좋아했던 클라우스는 요구에 맞는 퍼페추얼 캘린더 모듈을 설계하는 방법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IWC가 ‘다 빈치(Da Vinci)’라고 이름 붙인 이 시계는 1985년 바젤월드에서 데뷔했으며, 밸주 7750과 IWC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쇼파드를 비롯한 여러 브랜드는 여전히 밸주 7750을 사용한다.
완벽한 베이스
IWC에서 밸주 7750에 컴플리케이션을 추가한 사람은 커트 클라우스뿐만이 아니다. 시계 제작자인 리차드 하브링(Richard Habring)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개발해야 하는 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밸주 7750을 베이스로 활용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는 두 개의 칼럼 휠에 의존해야 했지만 밸주 7750에는 그런 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브링은 무브먼트의 특수성을 활용해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위한 캠 회로를 고안해냈다. 1990년대에 IWC는 커트 클라우스의 퍼페추얼 캘린더와 리차드 하브링의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결합했고, 밸주 7750이 오늘날까지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결합할 수 있는 완벽한 베이스 무브먼트임을 증명했다.
밸주 7750을 베이스 삼아 무브먼트를 변형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업계 최초의 시도도 적지 않다. 시계 제작자 폴 피코(Paul Picot)는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를 갖춘 최초의 셀프와인딩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인 아틀리에 테크니컴(Atelier Technicum)을 선보였으며, 포티스(Fortis)는 1998년에 시계 제작자 파울 게르버(Paul Gerber)가 개발한 최초의 알람식 크로노그래프를 출시했다. 파울 게르버는 알람 기능을 구동할 배럴을 하나 더 추가하며, 로터 크기도 1.5mm 늘렸다. 라 주 페레(La Joux-Perret)와 같은 무브먼트 전문가는 밸주 7750을 칼럼 휠 방식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에드먼드 캅트의 아이디어와는 완전히 상충하지만, 메커니즘 면에서 칼럼 휠은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새로운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도 효율적이다.
밸주 7750은 ETA의 대형 발그랑주 시리즈 등 다양한 무브먼트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거대한 가계도
제작사 밸주 역시 밸주 7750에 많은 공을 들였다. 더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기 위해 무브먼트 제품군을 개발했다. 크로노그래프, 풀 캘린더, 문페이즈 디스플레이를 갖춘 밸주 7751, 서브 다이얼의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사람을 위해 서브 다이얼을 다이얼 왼쪽에서 아래쪽으로 옮긴 밸주 7753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밸주 7750은 발그랑주(Valgranges) 시리즈로 발전하며 13라인(지름 약 30mm)에서 16라인(지름 약 36mm)이 되었다. 기능은 유지하되 사이즈를 키워서 2000년대에 유행했던 큰 시계에 적합하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매우 복잡한 수정을 거치며 밸주 7750은 다용도의 베이스 무브먼트로 자리 잡았지만, 수년에 걸쳐 생산한 초기의 7750 모델에 비하면 그 개수는 훨씬 적다. 밸주 7750을 한 번이라도 사용한 적 있는 브랜드 목록은 마치 시계 제조 분야의 인명록과 같다. 오메가, 에테르나, 모리스 라크로와, 론진, 브라이틀링, 에버하르트, 크로노스위스, 보메 메르시에, 해밀턴, 티쏘 외에도 셀 수 없다. 밸주 7750은 시계 브랜드뿐만 아니라 시계 애호가, 수집가에게도 사랑받았다. 견고한 구조 덕분에 일상생활에서도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으며, 수리 비용도 저렴하기 때문이다. 또한 크로노미터 인증도 문제없이 충족한다. 로터는 상당히 크고 무거운 편이며 한 방향으로만 회전하기 때문에 공회전할 때 시계가 약간 떨리는 현상이 생긴다. 단점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시계 팬들이 좋아하는 밸주 7750만의 특징이 되었다.
고전이 남긴 유산
최근 점점 더 많은 매뉴팩처 칼리버가 등장하고 셀리타 SW 500과 같은 새로운 베이스 무브먼트가 자리 잡으면서 밸주 7750의 존재감이 조금 희미해졌다. 밸주를 제작하는 ETA 무브먼트 공급을 외부 브랜드에는 제한하기로 한 스와치그룹의 결정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밸주 7750이 남긴 유산은 과거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받은 차세대 무브먼트를 통해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게재호
91호
글
마르틴 그린
Editor
채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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